해저 통신케이블에 대한 공격과 사고가 글로벌 금융 시스템의 새로운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해저 케이블은 지정학적 갈등 시 국가 간 공격의 주요 표적이 되고 있다.
뉴욕과 런던 등 글로벌 금융허브 인근의 해저를 중심으로, 전 세계 자금 흐름의 99%가 해저 케이블 통신망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 이 통신망에 대한 물리적 공격은 전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파괴, 사이버 해킹보다 더욱 치명적이라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한국의 경우, 부산이 동북아 해저 케이블의 핵심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미주와 동남아를 잇는 국제망이 부산에 집중돼 있다. 서울 여의도 금융권의 외환·결제 시스템도 대부분 이 케이블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정체불명의 선박이 해저 케이블을 파손하는 사건이 최근 잇따르면서, 글로벌 금융 시장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FT에 따르면, 한때 군사적 위협으로만 여겨졌던 해저 케이블 공격이 이제는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의 존립을 위협하는 새로운 ‘아킬레스건’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커들의 사이버 공격보다, 물리적 인프라 파괴가 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최근 발생한 일련의 의문의 해저 케이블 사고들은 각국 정부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긴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경계해야 할 주체는 이들만이 아니다. 바로 금융 서비스 산업이라고 FT는 지적했다.
만약 영국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이나, 미국 동부 해안을 잇는 케이블 여러 개가 동시에 절단된다면? 금융거점인 씨티와 월스트리트에는 막대한 혼란과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런던과 뉴욕은 이에 대비해야 한다.
작년 성탄절, 쿡아일랜드 국기를 단 유조선 이글에스 호가 핀란드 만에서 해저 케이블 5개를 충돌로 끊어버렸다. 핀란드 국경수비대가 러시아의 ‘그림자 함대’에 속하는 이 선박을 승선 조사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이 사건은 케이블 운영업체들뿐 아니라, 핀란드 금융안정청(RVV) 청장 야코 베우로(Jaakko Weuro)의 눈길도 끌었다고 FT는 밝혔다.
RVV는 2015년 설립된 기관으로, 금융위기 여파로부터 납세자를 보호하고 위기를 예방하는 것이 임무다. 해저 인프라를 직접 관할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 세계 500개 이상의 데이터 케이블을 통해 매일 10조 달러(약 1경 3876조 원) 규모의 자금이 오간다는 점에서 해저 케이블에 무관심할 수 없었다.
베우로 청장은 이글에스 호가 더 많은 케이블을 파손했더라면, “핀란드의 금융안정성이 흔들릴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핀란드는 2022년부터 정전 사태에도 결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기초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핀란드식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그는 “케이블은 필수적이다. 위성을 대체 수단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위성은 비용이 비싸고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현재 인터넷 트래픽의 99%, 사실상 모든 금융거래가 해저 케이블을 통해 이뤄진다.
그렇다면 케이블 시스템이 멈추면 어떻게 될까? 답은 불명확하다고 FT는 설명했다. 런던과 뉴욕 역시 케이블 의존도가 높다. 두 도시의 앞바다는 각각 영국과 유럽, 미국 동부와 유럽을 잇는 해저 케이블의 집결지로, 공격 표적이 되기 쉽다.
해저 케이블은 보통 이중화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한 줄이 끊기면 ‘쌍둥이 케이블’이 자동으로 트래픽을 넘겨받는다. 하지만 여러 줄이 동시에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몇 분간의 장애만으로도 금융기관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1억 파운드(약 1886억 5300만 원) 규모의 거래가 진행 중 케이블이 손상돼 백업선마저 작동하지 않는다면, 누가 손실을 책임질 것인가? 케이블 수리는 최상의 조건에서도 며칠이 걸린다.
따라서 런던과 뉴욕의 은행 경영진은 해저 케이블 두절 사태에도 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 대규모 사이버 공격이나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비해 비상계획을 세워야 하는 것처럼.
현재 영란은행은 업계 차원의 스트레스 테스트(SIMEX)를 통해 인프라 장애 대응을 훈련하고 있다. 미국의 쉘터드 하버(Sheltered Harbor) 프로그램은, 사이버 사고 시 기본 운영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해저 케이블이 끊긴다면, 상황은 다르다. “돈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장은 왜곡될 수 있다. 승자와 패자가 생길 것이다. 특정 은행이 지나친 손실로 국가 금융시스템 전체를 위협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회복에 걸리는 시간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베우로 청장은 여전히 핀란드의 ‘플랜 비’를 구축 중이다.
글로벌 금융 허브가 파괴적 상황에 대응하려면 결국, 은행뿐 아니라 정부, 케이블 운영업체, 보험사, 케이블 수리업체까지 모두 참여해야 한다고 FT는 강조했다. 준비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