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부터는 대형빌딩 등의 지분 일부를 스마트폰으로 사고팔며, 배당금도 받을 수 있게 된다.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지형도를 바꿀 ‘토큰증권(STO·Security Token Offering)’ 시대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토큰증권은 블록체인 기반 분산원장을 활용해 발행·관리되는 디지털 형태의 증권으로, 내년 2월 4일부터 시행된다.
정부가 앞장서 토큰증권의 제도·인프라 설계를 서두르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4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민·관 합동 '토큰증권 협의체' 첫 회의를 열고 향후 운영 계획과 정책 방향 논의를 시작했다. 토큰증권을 겨냥해 증권사와 핀테크 플랫폼, 실물 자산 발행사들은 각각 거대한 생태계를 구축하며 이른바 ‘금융판 합종연횡’에 나서고 있다. 단순한 신상품 출시를 넘어, 부동산·미술품·지식재산권(IP) 등 모든 자산이 디지털로 쪼개져 거래되는 ‘금융 민주화’의 서막이 올랐다는 평가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이날 회의에서 “토큰증권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자본시장의 구조적 융합을 뒷받침하는 축이 될 것”이라며 “좋아하는 가수의 음원에 투자해 저작권료를 배분받는 증권, 전문 축산농가에 투자해 한우 경매대금을 배분받는 증권 등 투자자가 개인적 관심을 기반으로 구체적인 기초자산이나 프로젝트에 투자할 수 있는 다양하고 혁신적인 토큰증권이 등장할 수 있도록 발행·유통·공시 등 제도 전반을 정비하겠다”고 말했다.
STO 시장의 시계가 빨라진 것은 지난 1월 15일, 자본시장법 및 전자증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부터다. 그간 ‘규제 샌드박스’라는 임시 틀 안에 갇혀 있던 조각투자가 마침내 제도권이라는 고속도로에 올라탄 것이다. 이재명 정부가 ‘디지털 자산 규제 체계 마련’을 국정과제로 명시하고 ‘코스피 6000 시대’를 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입법 속도는 더욱 탄력을 받았다.
금융위는 지난달, 시장의 ‘관문’ 역할을 할 장외거래소 예비인가 사업자로 한국거래소 중심의 컨소시엄(KDX)과 대체거래소 기반의 컨소시엄(NXT) 두 곳을 선정했다. KDX에는 키움증권·교보생명·카카오페이증권이 공동 최대주주로, 미래에셋·케이비(KB)·한화투자증권 등 20여 개 증권사와 STO 기업이 참여했다. NXT에는 신한투자증권·하나증권·뮤직카우 등 금융·핀테크 업체들이 연합했다. 금융위는 장기적으로는 스테이블코인과 연계한 실시간 결제 시스템 도입까지 검토할 방침이다.
증권가는 체급 불문 ‘무한 경쟁’
시장 선점을 향한 증권사들의 움직임은 가히 ‘전쟁’ 수준이다. 특히 대형사와 중소형사 간의 전략적 포지셔닝이 뚜렷하다.
미래에셋증권은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의 지분 92%를 전격 인수하며 발행부터 유통까지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를 완성하려 한다. 홍콩에서 디지털 채권을 발행하는 등 글로벌 표준 선점에 가장 앞서 있다는 평가다. 신한투자증권은 NXT의 대주주로서 뮤직카우, 서울옥션블루 등 7개 주요 조각투자사와 연합군을 결성했다. 계좌관리기관으로서의 인프라를 제공하며 ‘STO 허브’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한화·에스케이(SK)·디비(DB)증권 등 중소형사들은 틈새시장 공략에 사활을 걸었다. 한화투자증권은 글로벌 웹3 기업 ‘크리서스’에 전략투자, 지갑·보안 기술을 확보했다. SK증권은 바이셀스탠다드와 손잡고 선박·에너지 등 비정형 자산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DB증권은 글로벌 블록체인 ‘솔라나’와 STO 기반 디지털 자본시장 구축 협약을 체결했다.
글로벌 ‘디지털 자산’ 패권 다툼 격화
해외 시장은 이미 STO를 차세대 자본시장의 표준으로 낙점했다. 미국 블랙록(BlackRock)은 달러 기반 디지털 유동성 펀드 ‘비들(BUIDL)’을 통해 시장 점유율을 확장 중이다. 제이피모건과 골드만삭스 등 월스트리트의 대형 투자은행들도 토큰화 프로젝트를 쏟아내고 있다. 일본 역시 노무라와 미쓰비시 등이 참여하는 국채 토큰화 실증 실험에 박차를 가하며 아시아 STO 허브 자리를 노리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에 따르면, 국내 STO 시장은 2030년까지 약 367조원(국내총생산의 14.5%)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다. 신범준 한국핀테크산업협회 STO협의회장은 “STO는 자산 불평등 해소와 한국 금융의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필수 엔진”이라고 강조했다.
장밋빛 전망 속 ‘기술 탈취’ 논란 등 과제 산적
물론 넘어야 할 산도 많다. 이번 예비인가 과정에서 탈락한 루센트블록이 NXT 컨소시엄 측에 ‘기술 탈취’ 의혹을 제기하며 공정거래위원회 조사가 예고된 상태다. 조사 결과에 따라 본인가 심사가 중단될 수 있다는 조건부 승인인 만큼, 시장의 불확실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비정형 자산의 특성상 발행사와 투자자 간 ‘정보 비대칭’에 따른 소비자 피해 우려도 나온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실물 자산의 가치와 토큰 가격이 괴리될 경우 시장 신뢰가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STO업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제 승부는 ‘어떤 자산을 얼마나 빨리 증권화해 유통시키느냐’에 달렸다”며 “부동산·미술·음원 저작권을 넘어 항공기 엔진, 신약 특허, 인프라 수익권까지 기초자산 확장이 본격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증권업계 고위 관계자는 “AI가 데이터 산업을, 반도체가 제조업을 바꿨다면 STO는 금융의 문법을 바꾸는 기술”이라며 “내년 출범은 시작에 불과하다. 누가 유통망과 신뢰를 선점하느냐에 따라 판도가 갈릴 것”이라고 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