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9개월 된 아기는 아직 ‘중력’이라는 단어를 모른다. 하지만, 장난감을 떨어뜨리며 물체는 아래로 떨어진다는 사실을 이미 안다”.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차세대 인공지능(AI)의 발전방향을 설명하며 이같은 예를 들었다. 지금까지 AI가 사람의 언어를 배웠다면, 앞으로는 사람처럼 현실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AI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WEF는 이를 ‘월드 모델(World Models)’이라고 명명하며, 향후 10년을 바꿀 핵심 기술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생성형 AI 열풍을 이끈 챗지피티는 인간이 남긴 수조 개의 문장을 학습해 언어를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한다. 컵을 떨어뜨리면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지, 비가 오면 도로의 마찰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컨테이너를 먼저 옮기는 것이 효율적인지, 로봇 팔이 컵을 어느 정도 힘으로 잡아야 깨뜨리지 않는지까지는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 인간이 설명한 언어는 이해하지만, 현실 세계의 물리 법칙은 직접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WEF는 바로 이 한계를 극복하는 기술이 바로 월드 모델이라고 설명했다. 월드 모델은 텍스트뿐 아니라 영상, 깊이 센서, 압력 센서, 모션 데이터 등 다양한 현실 정보를 동시에 학습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스스로 이해한다.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AI가 아니라, “다음에 현실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를 예측하는 AI라는 것이다.
월드모델은 최근 AI 업계의 가장 뜨거운 경쟁 분야라고 WEF는 밝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5년 공개된 엔비디아의 코스모스(Cosmos).
이 플랫폼은 로봇, 산업현장, 자율주행 등에서 수집한 2000만 시간 이상의 현실 데이터를 학습해 로봇이 처음 접하는 환경에서도 적응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기존 로봇이 수많은 사례를 암기하는 방식이었다면, 코스모스는 물체가 움직이는 원리와 사람의 행동 패턴, 공간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이와 함께 얀 르쿤(Yann LeCun)이 제안한 ‘공동 임베딩 예측 아키텍쳐(JEPA·Joint Embedding Predictive Architecture)’도 월드 모델 연구의 중요한 이정표로 꼽힌다고 WEF는 밝혔다. 르쿤은 “다음 단어를 예측하는 방식만으로는 인간 수준의 AI에 도달할 수 없다”며, “AI는 세상의 인과관계와 물리 법칙을 학습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 같은 접근은 구글 딥마인드, 오픈AI, 테슬라 등 글로벌 AI 기업들이 로봇과 자율주행, 과학 연구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이어가는 배경과도 맞닿아 있다.
WEF에 따르면, 월드모델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분야는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지금까지 로봇은 공장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쉽게 멈췄다. 바닥에 새로운 장애물이 생기거나 물체의 위치가 조금만 달라져도 다시 학습해야 했다.
하지만 월드 모델을 탑재한 로봇은 사람처럼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서도 물체의 움직임과 공간의 구조를 추론해 스스로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자동화를 넘어 ‘판단하는 로봇’ 시대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로봇 경쟁의 핵심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그중에서도 얼마나 정교한 월드 모델을 구축했느냐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WEF는 제조업과 물류가 월드모델을 가장 먼저 도입할 산업으로 꼽았다. 보고서가 제시한 2031년의 항만은 이미 AI가 조수 간만의 차, 바람의 방향, 컨테이너 무게, 선박 입항 일정까지 종합적으로 분석해 작업 순서를 스스로 최적화한다. 현장 관리자는 AI가 만든 계획을 검토하고 예외 상황만 판단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다.
스마트항만과 반도체 공장, 자동차 생산라인은 이미 수많은 센서와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여기에 월드 모델이 결합하면, 공장과 물류센터는 스스로 학습하고 운영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자율 운영 시스템’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
WEF는 월드모델이 가져올 위험도 함께 경고했다. 기존 생성형 AI의 가장 큰 문제는 ‘환각(Hallucination)’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는 현상이다.
반면 월드 모델은 더 근본적인 위험을 안고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 자체를 잘못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오류는 실험실에서는 드러나지 않다가, 실제 공장이나 자율주행차, 의료 현장에서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보고서는 이를 막기 위해 지속적인 검증과 스트레스 테스트, 데이터 드리프트 감시, 책임 기준과 감사 체계 마련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기술 개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WEF는 국제 표준과 안전 인증, AI 책임 체계, 데이터 공유 인프라 등 제도적 기반이 함께 마련돼야 월드 모델의 잠재력을 현실의 경쟁력으로 연결할 수 있다고 역설했다.
WEF는 매년 과학계와 산업계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향후 사회와 산업 전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혁신 기술 10가지를 선정해 발표하고 있다. 올해 선정된 기술은 월드 모델 이외에, △전기를 쓰는 모든 기기를 전력망의 일부로 활용하는 ‘에브리싱 투 그리드(Everything-to-Grid)’,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도 표면 온도를 낮출 수 있는 ‘수동형 복사냉각(Passive Radiative Cooling Materials)’, △염수 속 리튬 이온만 선택적으로 분리하는 ‘직접 리튬 추출(Direct Lithium Extraction)’, △자연 상태에서 거의 분해되지 않고 환경에 축적돼 인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과불화화합물 분해(PFA Destruction)다. 이어, △유전자 조작 미생물을 이용해 특정 단백질이나 화합물을 생산하는 정밀 발효(Precision Fermentation), △세포가 자연적으로 분비하는 나노 크기의 소포체를 치료제 운반체로 활용하는 ‘엑소좀 기반 약물 전달(Exosome Drug Delivery)’, △환자의 종양 세포를 분석해 해당 환자의 암세포에만 있는 돌연변이를 찾아내고 면역계가 이를 인식하도록 훈련시키는 ‘개인 맞춤형 mRNA 암 백신(Personalized mRNA Cancer Vaccines)’, △복잡한 분자 구조를 보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도록 한 ‘신약 개발을 위한 양자 시뮬레이션(Quantum Simulation for Drug Discovery)’, △고차원 수학 구조를 활용해 암호를 생성하는 ‘격자 기반 암호기술(Lattice-Based Cryptography)’을 WEF는 꼽았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