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식의 소유권과 권리를 블록체인에 기록해 24시간 거래할 수 있도록 하는 길이 열렸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화 주식(tokenised stocks)’ 거래를 제도권 시장에서 허용했다.
SEC는 일정한 조건을 충족하는 블록체인 기반 거래 플랫폼에 대해 5년간 한시적으로 규제를 제외하는 ‘혁신 면제(Innovation Exemption)’를 지난 17일 발표했다. 이에따라 그동안 가상화폐 시장에서 주식과는 별도로 움직이던 ‘토큰’과, 뉴욕의 전통적 시장이 본격적으로 연결되기 시작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이번 조치로, 토큰화된 주식은 전통적인 주식과 동일하게 배당권, 의결권 등 권리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거래정지가 발생하면 기존 주식시장과 같은 시점에 거래를 중단해야 한다. 주식을 토큰화하려는 플랫폼은 해당 주식을 발행한 기업에 사전 서면 통지를 하고,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제공해야 한다.
현재 뉴욕증시와 나스닥의 정규 거래시간 밖에서는 일반적인 주식 거래가 제한된다. 반면 블록체인 기반 시장은 기술적으로 24시간 거래가 가능하다.
이번 조치로 투자자는 주말이나 야간에도 토큰화된 주식을 사고팔 수 있고, 이를 다른 디지털 자산이나 금융상품과 결합할 수도 있게 됐다. 특히, 주식이나 채권을 블록체인상에서 프로그래밍 가능한 자산으로 만들면 담보 설정과 이전, 결제 등의 절차를 자동화할 수 있다.
다만, 이번 조치는 구속력 있는 입법(클래리티 법)이 아닌 행정 명령 성격이다. 향후 5년 내에 번복되거나, 정식 법제화로 이어질 수 있는 과도기적 조치라고 FT는 지적했다.
한편, 유럽도 움직이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지난 21일 블록체인 기반 금융시장과 중앙은행 지급결제 시스템을 연결하는 ‘폰테스(Pontes)’를 출범시켰다. 블록체인상에서 거래되는 금융자산을 민간 스테이블코인이 아니라 중앙은행이 뒷받침하는 유로화로 결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도이치 뱅크, 산탄데르, 클리어스트림 등이 초기 참여자로 들어갔다.
미국 SEC의 토큰화 주식 거래 허용 조치는 가상화폐 기업들이 전통적인 주식시장에 보다 적극적으로 진입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FT는 예상했다. 토큰화 주식이란, 전통적인 주식을 블록체인상에서 디지털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찬성론자들은 토큰화 주식의 장점으로 여러 가지를 꼽는다. 우선 투자자가 24시간 거래를 할 수 있다. 또한 전통적인 주식 거래보다 비용이 낮을 수 있으며, 다른 자산보다 담보로 활용하기도 쉽다.
SEC의 이번 명령은, 주식 토큰의 확산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는 때 내려졌다. 특히 기업들은 자사의 전통적인 주식을 토큰화한 상품이 자신들의 동의 없이 만들어지는 데 반발하고 있다.
미국의 온라인 증권사 로빈후드(Robinhood)는 미국 밖에서 토큰화 주식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로빈후드는 주식 발행기업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해당 기업 주식에 연동된 토큰을 제공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영화관 체인 에이엠씨의 최고경영자(CEO) 애덤 애런은 이달 로빈후드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소셜 미디어 엑스(X)에 올린 글에서 “우리는 이 상품과 전혀 관계가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이를 승인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는 로빈후드의 상품을 사실상 “사기에 가까운 시장(quasi-fake market)”이라고 비판했다.
SEC의 ‘혁신 면제’가 핵심
SEC가 이번에 도입한 이른바 ‘혁신 면제’에 따르면 미국에서 토큰화 주식을 제공하려는 로빈후드 같은 기업은, 토큰화하려는 주식의 발행기업에 대해 서면으로 사전 통지하고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블록체인 기반 토큰은 전통적인 주식과 “동일한 권리와 특권(same rights and privileges)”을 투자자에게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는 대표적으로 의결권 등이 포함된다.
또 토큰화 주식의 거래가 중단되는 경우에는 전통적인 주식시장에서도 거래가 중단되는 것과 동시에 거래가 멈춰야 한다. 즉 단순히 주가만 따라가는 디지털 상품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 주식의 법적·경제적 권리를 토큰에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FT는 강조했다.
로빈후드와 크라켄은 기존 상품 바꿔야
로빈후드와 크라켄의 모회사인 페이워드(Payward) 같은 업체들은 현재 미국 밖에서 투자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상품의 구조를 바꿔야 할 가능성이 있다. 현재 이들 기업은 토큰을 상장할 때 해당 주식 발행기업의 허가를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토큰 보유자에게 직접적인 의결권도 제공하지 않는다.
FT에 따르면, 현재의 상품은 본질적으로 해당 기업의 주가를 추종하는 파생상품(derivative)처럼 작동한다. 따라서 이들 기업은 미국 이외의 시장에서는 기존 파생상품 모델을 계속 제공할 수 있지만, 미국에서 SEC의 혁신 면제를 활용하려면 실제 주식과 동일한 권리 구조를 갖춰야 한다.
법률 공백 속에서 SEC가 먼저 움직여
SEC의 이번 혁신 면제는 미국 의회가 가상화폐 산업에 대한 종합적인 법률을 마련하는 과정이 지연되는 가운데 나왔다. 미국의 가상화폐 산업에 대한 포괄적인 규제 법안으로 불리는 클래리티 법은 상원에서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디지털 자산 산업을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다 강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의회의 입법이 막히면서, SEC가 기존 법률 아래에서 활용할 수 있는 면제 권한을 통해 먼저 시장의 길을 열어준 셈이라고 FT는 짚었다.
5년간 기존 거래소 규정의 일부 면제
이번 명령은 토큰화 주식 거래를 제공하려는 거래 플랫폼에 대해 5년간 한시적으로 나스닥이나 뉴욕증권거래소(NYSE) 같은 전통적인 거래 플랫폼에 적용되는 여러 규정에서 면제해준다. SEC가 디지털 시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해 규제 샌드박스에 가까운 접근을 취한 것이라고 FT는 평가했다.
SEC는 이번 기간 동안 실제 시장에서 토큰화 주식 거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관찰하고, 향후 영구적인 규제체계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다. SEC의 마크 우예다 위원은 이번 조치가 발행·거래·이전·결제·소유권 기록 등 핵심적인 시장 인프라를 현대화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가상화폐 업체와 기존 거래소의 경쟁
가상화폐 기업들은 전통적인 거래소와 증권사에 도전하기 위해 토큰화 주식 거래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장기적으로 주식뿐 아니라, 채권·원자재 등 거의 모든 자산이 블록체인에서 24시간 거래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즉 가상화폐 거래소의 24시간·글로벌 거래 구조를 전통 금융시장에 적용하려는 것이다.
일부 가상화폐 기업들은 로빈후드의 파생상품 모델에 반대하고 있다. 이들은 주식의 토큰화 과정에서, 해당 주식을 발행한 기업이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토큰화 금융회사 시큐리타이즈(Securitize)의 최고경영자 카를로스 도밍고는 “토큰화는 기업이 관여하지 않은 채 기존 주식의 평행 버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주식 소유 방식을 현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사 주식을 직접 블록체인에 올리기도
SEC의 이번 조치 이전에는 실제 주식을 직접 토큰화해 발행한 기업은 많지 않았다. 블록체인 기술 기업 피겨 테크놀로지 솔루션스는 올해 2월 자사의 주식을 블록체인에 직접 발행했다.
이는 중요한 차이다. 기존의 ‘주가 연동 토큰’은 주식을 직접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변동에 따른 경제적 이익을 추적하는 구조일 수 있다. 반면, 직접 토큰화 방식에서는 토큰 자체가 실제 주식의 소유권과 연결된다.
“주식연계증권 등과 뭐가 다른가” 반발도
토큰화 업체 온도파이낸스(Ondo Finance)의 마티외 드 베르뉴는 주식 가격과 연계된 파생상품 자체는 이미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미국 투자자가 해외 주식에 투자할 때 활용하는 주식연계채권(Equity-linked Notes)이나 미국예탁증서(ADR) 등이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토큰화 여부 자체가 아니라, 규제된 시장 안에서 실제 주식시장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돼 있느냐라는 주장이다. 그는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규제를 받으면서 실제 시장과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FT에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