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규 칼럼] "조선인은 사물파악 능력도 없고, 시기·질투·견제만 잘한다"

  • 카카오공유 
  • 메타공유 
  • X공유 
  • 네이버밴드 공유 
  • 프린트
  • 메일
  • 스크랩
  • 목록
  • 글자크기
  • 크게
  • 작게

 

오창규 데이터뉴스 대표

한국인은 본래 일본인 또는 중국인과 같은 수준에서 사물을 파악하는 능력이 없다. 사물을 제대로 보는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부패했기 때문에 자력으로 훌륭한 사회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가 없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인종적 결함과 낡고 뒤떨어진 정치 사회제도 때문에 외부로 부터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는 후진 상태를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이란 극동의 모든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의 나라이며, 조선민족은 가장 문명이 뒤진 미개한 인종이다. 반면 일본은 엄한 정치의 나라이며 일본 민중은 지성과 활력 혈기 넘치는 문명국민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1905년 언론인 G 케난에게 보낸 편지 내용)

"한국인의 민족성 자체가 단결 정신이 부족하다. 민족 혁명을 영도할 위대한 영수(領袖)가 존재하지 않는다. 중심 사상이 결핍돼 있다. 각 당파 간에 극심한 시기·질투·견제 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한국 민족은 개성이 워낙 강한 데다 자존심이 세며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강하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나이 든 사람들은 청년들이 유치하고 무지하다고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사람마다 품고 있는 마음이 다르고, 타인의 말을 들으려는 정신이 부족해 의견이 엇갈리고 당파가 난립했다. 서로 기득권을 지키는 데만 급급해 전혀 양보하지 않는 당파들이 진정한 통일을 이루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 보인다." (1939105일 중화민국 중앙조사통계국 관리 왕룽성(汪榮生)이 작성한 보고서) 

위 내용을 읽다보면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에 앞서 부끄러움과 반성이 교차한다. 임진왜란 직후 유성룡선생은 발등을 송곳으로 찌르는 심정으로 참회의 징비록를 썼다. 하지만 대한민국 국민 중 징비록을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1905년은 러일전쟁에 이어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다.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조선을 먹기로 합의한 카스라-테프트 밀약도 이 때 이뤄졌다. 18~19세기에는 국제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대였다. 특히 당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초미의 관심이었다. 러시아는 산업혁명과 함께 대국으로 등극한 영국과 프랑스 등과는 달리 뒤늦게 식민지개척과 부동항 확보에 나섰다. 스웨덴의 땅이었던 상페테르부르크까지 차지한 러시아의 부동항확보 등 영토야욕은 대단했다. 그러나 영국의 제재로 인해 더 이상 유럽으로의 남하가 힘들어졌다. 러시아는 방향을 동방으로 틀었다.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한반도를 노렸다. 러시아가 영토학적으로 대국이 된 배경이다. 시베리아는 당시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블라디보스톡 그 이름의 뜻만 봐도 알 수 있다. 러시아어로 블라디=정복하라, 보스톡=동쪽의미를 담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맹주들은 러시아의 동방정책에 고민이 클 수밖에 없었다. 너무 먼 곳까지 가서 싸울 여력이 없었다. 특히 더 이상 주둔시킬 군병력이 없었다. 따라서 조선과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대리전 정책이 나왔다한다. 바닷길은 일본, 내륙은 조선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다는 전략이다. 일본의 메지지유신 역시 이 같은 전략의 파생상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양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한 일본시찰단 역시 같은 차원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독일의 비스마르크 대통령은 시찰단에게 강의를 통해 결정적인 비법까지 가르쳐주었다.

당신네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처럼 식민지가 있느냐? 러시아처럼 대국이냐? 자원은 있나? 무슨 수로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갈 수가 있느냐? 우리 독일은 식민지가 없다. 오르지 기술을 통해 제품으로 수출 강국이 되었다. 우리 독일처럼 기술로 승부해라.

일본은 서양의 물심양면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독일 베끼기를 나섰다. 그들의 적극적인 지원아래 말이다. 일본이 이같이 시대흐름을 탈 수 있었던 것은 막부들의 승복할 줄 아는 사무라이 문화도 한몫했다. 일본도와 소총으로 서양의 함포를 이길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굴욕적이지만 1854년 미 ·일 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했다. 700년의 막부시대를 종식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복고 시대가 열린 것도 결정적이다. 기득권이 없는 신흥세력과 서방세력의 러시아남하 저지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 작품이 메지지유신이다. 얼마안가 일본은 -일 전쟁-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열강의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그러나 조선은 정 반대의 길로 갔다. 186312살밖에 되지 않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정치권력을 잡았다. 그는 왕권강화와 함께 밖으로는 쇄국정책으로 일관했다. 영국이 청나라와 벌인 아편 전쟁에서 이겨 홍콩의 지배권을 가져가고, 러시아가 1860년에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맺어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국경이 맞닿게 되자 서양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극에 달했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대표적이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함대가 군함 7, 대포 10,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이다.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조선의 귀중한 책 1,007, 5,067권이 보관된 외규장각 문고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395권을 골라 프랑스로 가져갔다.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 버렸다. 조선군은 강화도 문수산성에서 일어난 싸움에서 패배했으나, 양헌수 장군이 강화도 정족산성에서 맹포격을 하여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같은 해 제너럴셔먼호 사건도 일어났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자기네와 물건을 사고팔 것을 요구했다. 당시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통상 수교를 거부했다. 그러자 제너럴셔먼호의 미국인들은 조선 관리를 인질로 삼고, 끈질기게 통상을 요구했다. 이에 평양 사람들은 마침 장맛비가 빠져나가 모래톱에 걸려 있었던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워 버렸다. 이어 1868년 오페르트 도굴사건도 발생했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는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1871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문제 삼아 강화도에 아시아 함대를 보내 쳐들어왔다.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에 대포 85문을 싣고 1,230명의 해군을 이끌고 초지진에 상륙했다. 서양의 위력적인 무기는 당해낼 수 없었다. 결국 광성보는 함락당했다. 그러나 다음 날, 조선군은 밤에 초지진을 습격하여 미국 군을 40여 일만에 조선 땅에서 내쫓았다. 신미양요다. 승리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흥선 대원군은 척화비’(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으면 화의를 맺는 것인데, 화의를 맺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를 전국에 세우면서 문을 걸어잠궜다.

그러나 불행의 씨앗은 이미 잉태되고 말았다. 열강반열에 올라선 일본은 자신들이 서양으로 부터 당한 수법을 그대로 조선에 사용했다. 일본 군함 운요호가 포함외교(砲艦外交)의 일환으로, 18759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함포로 공격,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그 후 일본은 함포와 신흥무기를 앞세우고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나 운요호사건의 책임을 물으며 수교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226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후 조선은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동학운동(1894), 갑오개혁(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5), 러일전쟁(1905), 을사조약(1905), 한일합방(1910)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는 풍전등화의 나라로 전락했다 

왕이 러시아공사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은 조선패망의 절정이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던 서양열강들의 시각에는 조선이 구제불능의 나라로 비춰졌다.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먹도록 하고, 대신 러시아남하를 책임지고 막으라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구제불능 나라 발언 역시 같은 맥락이다 

왕룽성의 보고서도 먼 시절의 얘기가 아니다. 일제강점기 얘기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민의 40%가 노비인 나라였다. 갑오경장으로 노비제 폐지가 이뤄지고,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없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영훈 서울대 전 교수는 최근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라는 책에서 세종이 노비제를 법제화강화하면서 노비공화국이 됐음을 강조하면서 "세종은 노비를 정상의 인류로 간주하지 않았다"고 까지 지적했다. 국민의 40%가 노비인 나라는 조선이 유일했다. 한마디로 한심한 나라였다 

지금도 그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반도 서남쪽 사람들은 대부분 좌파’, 동남쪽 사람들은 대부분 우파’(최근 PK(부산·경남)에서는 다소 변화가 있음)인 나라, 지역감정만 잘 이용하면 집권이 가능한 나라, 그리고 좌우만 있을 뿐 중도는 절대 용인되지 않는 나라, 집권과 함께 권력의 요직을 독점하는 나라. 조선왕조 말기와 다를 게 없다. 데이터뉴스가 최근 금융권 CEO를 분석해본 결과 72%가 영남과 호남출신이다. 이러한 현상은 금융권뿐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정부와 공기업의 정부부처, 정부 입김이 닿은 기업의 요직도 마찬가지다. 지난 정부까지는 TK(대구·경북) 일색이었다.

북핵 등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현재 열강들의 수 싸움 역시 조선말기와 크게 다를 바 없다. 특히 미국-중국간 패싸움은 자칫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상황이다. 조선 시대처럼 명분과 도덕만 따지는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이틈을 타 철저하게 실리를 취하고 있다. 미국의 묵시적 허락하에 엔화를 마구 찍어내 20년 불황을 타개하고 경제호황을 누리고 있다. 헌법을 고쳐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발을 내딛고 있다. 지난 24일에는 일본은 미국과 차세대 F-22기 개발을 함께 하기로 했다는 뉴스도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떠오른다.

국제사회는 조폭세계와 같다. 조폭세계에서는 도덕, 명분, 인정은 없다. 오로지 힘만 존재할 뿐이다. 조폭세계에서는 배신은 절대 용납이 안된다. 철저한 보복이 뒤따를 뿐이다. 조선말 지도자들이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었더라면 러-일전쟁은 조--러전쟁이 됐을 것이다. 지금 만주는 조선 땅일 가능성이 높다. -일합병은 물론 남북분단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는 만일에...”라는 가정이 없다. 하지만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이다.

chang@data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