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이 주류 금융의 핵심 인프라로 편입된다. 지난 1792년 시작된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가 블록체인의 분산원장 기술을 ‘운영 시스템’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NYSE는 기존의 전자 거래 시스템을 넘어선 ‘디지털 자산 생태계’를 미래 시장의 표준으로 보고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24시간 365일 내내 가동되는 블록체인의 특성이 주식 거래에 도입되면, 전 세계 자본 흐름의 속도는 비약적으로 빨라질 전망이다.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NYSE가 “가장 웅대하고 위험한 변신을 시도 중”이라며 최근 이같이 보도했다. NYSE의 경쟁사인 나스닥, 그리고 제이피모건 등 거대 금융사들도 가상자산 산업에 뛰어들고 있다. 특히, 주식, 채권 등 모든 자산을 디지털 토큰화해 거래하려는 ‘자산의 토큰화(RWA)’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WSJ에 따르면, 233년 역사의 NYSE는 가상자산(크립토)을 미래의 승부처로 점찍고 여기에 올인하고 있다. NYSE는 비트코인이 타파하고자 했던 모든 구체제의 상징과도 같다고 WSJ는 설명했다. 중앙 집중화되고, 폐쇄적이며, 주말에는 문을 닫는다는 것. 그러나, 월스트리트의 이 거물은 조용히 스스로를 예상치 못한 크립토의 강자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이 유서 깊은 거래소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수십억 달러(수조 원) 규모의 공세, 그리고 △블록체인 기반 증권의 24시간 거래 플랫폼 계획 사이에 놓여있다. 설립 후 몇 세기 동안 구축해 온 시스템 자체를 이 거래소는, 비트코인 배후의 분산 원장 기술을 통해 재탄생시키려 한다. 가장 웅대하고 위험한 변신을 시도 중이다.
NYSE 소유주(ICE·Intercontinental Exchange)의 전략 이니셔티브 부사장 마이클 블라우그라운드는 “시장이 아날로그에서 전자식으로 진화하는 과정의 최전선에 우리가 있어왔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 전자식에서 디지털로 전환되는 다음 물결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블록체인이 거래, 청산, 결제, 자본조달, 데이터 유통 등 NYSE 핵심 기능의 주요 인프라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그는 전망했다.
ICE의 창립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제프리 스프레처가 주도한 이러한 확신은 지난 3월 가상자산 거래소 오케이엑스(OKX)에 대한 약 2억 달러(약 2951억 원) 투자의 발판이 됐다. 이 거래에서 OKX의 기업 가치는 250억 달러(약 36조 8875억 원)로 평가받았다. 이는 중국에서 설립된 이 거래소가 미국의 연방 조사 해결을 위해 5억 달러(약 7377억 5000만 원) 이상의 벌금을 내기로 합의한 지 불과 1년 만에 이루어진 일.
이 투자는 예측 시장처럼 이전에 금기시됐던 위험한 베팅에 발을 들이려는 월스트리트의 더 광범위한 움직임의 일환이라고 WSJ는 강조했다. 현재는 크립토 강세론자들에게 힘든 시기다.
비트코인은 2018년 1분기 이후 최악의 연초 성적을 기록했다. 비트코인은 최근 7만 5000 달러(약 1억 1065만 5000 원) 선에서 거래되고 있다. 이는 작년 10월 기록했던 고점인 12만 6273달러(약 1억 8632만 8438.8 원)에 크게 못 미치는 수치. 고점 당시에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친(親) 가상자산 행보와 산업 우호적 규제가 디지털 자산의 황금기를 열어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과거라면 이러한 가격 폭락이 시장의 종말을 고했을 것이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의 크립토에 대한 식욕을 꺾지는 못했다고 WSJ는 평가했다. NYSE의 경쟁자인 나스닥(Nasdaq)은 지난달 가상자산 거래소 크라켄 등과 협력, 토큰화된 주식을 제공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제이피모건 체이스와 뱅크오브아메리카 같은 대형 은행들도 자체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검토 중이다.
지난 12월, 스프레처와 OKX 창립자인 스타 쉬는 런던의 한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제품 엔지니어링 배경과 조용한 성격이라는 공통점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했다고 WSJ는 밝혔다.
올해 말 ICE는 OKX의 가상자산 현물 가격 라이선스를 취득하고, 이와 연동된 미국 규제 선물 계약을 출시할 예정이다. 규제 승인이 나면, OKX의 1억 2000만 명이 넘는 글로벌 고객은 ICE의 미국 선물과 NYSE의 토큰화 주식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증권을 블록체인상의 디지털 토큰으로 발행하려는 거래소 계획의 핵심 단계다.
최근 NYSE는 ‘시큐리타이즈’와 파트너십을 맺고 24시간 거래 및 즉시 결제가 가능한 토큰화 증권 플랫폼 개발을 발표했다. 투자자들은 미 달러화에 고정된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해 거래 자금을 조달할 수도 있게 된다.
NYSE는 투자를 정치, 스포츠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내기를 거는 ‘예측 시장’으로도 확대했다. 지난 10월, ICE는 블록체인 기반 예측 시장 거래소인 폴리마켓에 최대 20억 달러(약 2조 9494억 원)를 투자하기로 합의했다. 이 기업 가치를 90억 달러(약 13조 2723억 원)로 ICE가 끌어올렸다.
이 이례적인 거래는 공통의 아픈 기억에서 시작됐다고 WSJ는 해석했다. 2024년 11월 13일, 미 연방수사국(FBI)은 폴리마켓 창립자인 셰인 코플란의 자택을 급습해 스마트폰을 압수했다. 스프레처 CEO는 법무부 조사가 종결된 후 코플란에게 연락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코플란은 잘못된 혐의로 기소되고, FBI의 압수수색을 당했다. 이는 나도 몇 년 전 겪었던 일”이라며 동질감을 드러냈다.
예측 시장은 성장 과정에서 논란에 직면해 있다. 트럼프 행정부와 미국의 주 정부들은 스포츠 등 이벤트 기반 계약이 △온라인 도박과 같은지, △규제 대상인지에 대해 갈등을 빚고 있다. 이에 대해 스프레처는 “NYSE의 관심사는 날씨나 기업 이벤트 관련 베팅에 있다”고 선을 그었다.
WSJ에 따르면, 전통적인 NYSE의 크립토 투자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2018년 야심 차게 출범했던 백트(Bakkt)는 사업 모델이 오락가락하며 2023년까지 10억 달러(약 1조 4749억 원) 이상의 손실을 기록했다. 현재 백트는 인공지능(AI) 기반 인프라 플랫폼으로 재기하려 노력 중이다. 하지만, 주요 고객 이탈로 인해 여전히 증명해야 할 숙제가 많이 남아 있다고 WSJ는 밝혔다.
권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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