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거대 금융그룹들이 앞다퉈, 가상자산 사업자(VASP·Virtual Asset Service Providers)와의 ‘금가(金假)융합’에 뛰어들고 있다. 지난 2017년 이후, 국내 금융사의 VASP 지분 보유를 금지해온 이른바 ‘금가분리’ 규제는 사실상 깨졌다. 스테이블코인·토큰증권(STO) 등 블록체인 금융 인프라를 둘러싼 글로벌 패권 다툼이 본격화하면서, 전통 금융과 가상자산 업계의 ‘합종연횡’이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하나금융그룹은 1조원을 들여 국내 최대 VASP인 업비트 운영사 두나무의 4대 주주에 오르게 됐다. 미래에셋그룹은 코빗 지분 92%를 1335억원에 인수했다. 한국투자증권은 글로벌 VASP인 오케이엑스(OKX)와 손잡고, 코인원 지분 공동 인수를 추진 중이다.
이같은 ‘금가융합’ 행렬에는 공통된 동인이 있다. 가상자산 전반의 제도화가 가속화하면서,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경쟁이 임계점을 넘어섰다는 분석이다. 또한 금융당국이 신규 VASP라이선스 인가를 사실상 막고 있어, 기존 라이선스 보유 거래소를 인수하는 것이 시장 진입의 유일한 현실적 경로라는 점도 인수합병(M&A) 열풍을 부추기고 있다.
금융권의 한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는 금융사가 VASP를 ‘리스크 자산’으로만 바라봤지만, 이제는 블록체인 인프라·고객 접점· 라이선스를 동시에 갖춘 ‘미래 금융 플랫폼’으로 재평가하고 있다”며 “이번 합종연횡의 물결은 투자를 넘어 미래 디지털 금융 질서의 판을 다시 짜는 작업”이라고 평가했다.
하나금융, 1조원 베팅… 업비트와 ‘지분 동맹’
하나은행은 카카오인베스트먼트가 보유한 두나무 지분 228만4000주를 약 1조33억원에 현금 취득하기로 최근 이사회에서 결의했다. 이번 거래는 국내 시중은행이 주요 가상자산 거래소 지분을 대규모로 사들인 최초의 사례다. 거래가 마무리되면 하나은행은 두나무 지분 6.55%를 보유해, 송치형 회장(25.51%), 김형년 부회장(13.10%), 우리기술투자(7.20%)에 이어 이 회사의 4대 주주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하나금융은 이번 투자를 두고 “전략적 지분투자를 통한 신금융 경쟁력 확보”라고 규정했다. 단순 재무 투자에 그치지 않는다는 강조다. 양사는 이미 지난해 12월 블록체인 기술 기반 금융 서비스 개발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맺었고, 올해 2월에는 블록체인 기반 외화 송금 서비스의 기술 검증(PoC)을 완료했다. 지난달에는 포스코인터내셔널과 3자 업무협약을 통해 두나무가 개발한 레이어2 블록체인(비트코인, 이더리움 등 레이어1 위에서 동작하며, 거래를 별도로 처리해 처리량은 늘리고 수수료는 낮추는 확장 솔루션) ‘기와 체인’을 이용한 금융 인프라 구축을 추진하기로 했다.
향후 양사 협력의 핵심은 세 축이다. 첫째, 기와 체인을 활용한 블록체인 기반 외화 송금 서비스 고도화다. 기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방식을 대체해 실시간 거래·정산 체계를 구축한다는 구상이다. 둘째,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유통·사용·환류를 아우르는 생태계 조성이다. 스테이블코인 제도화가 본격화되기 전 생태계 주도권을 선점하겠다는 포석이다. 셋째, 업비트 플랫폼과 하나금융의 펀드·연금·신탁 역량을 결합한 디지털자산 기반 종합자산관리 서비스다.
함영주 하나금융그룹 회장은 “이번 지분 투자는 디지털자산 기반 금융 혁신을 가속화하기 위한 전략적 결정”이라며 “두나무와 함께 ‘케이-블록체인’ 생태계 조성을 주도하겠다”고 밝혔다. 함 회장은 2023년 신년사에서 이미 “가상자산 등 비금융 부문에 적극 투자하겠다”고 선언한 바 있다.
미래에셋, 코빗 92% 사들여 ‘경영 장악’… 공정위 심사 중
미래에셋그룹은 국내 4위 VASP 코빗을 사실상 자회사로 편입했다. 그룹 계열사인 미래에셋컨설팅은 올해 2월 13일, 넥슨 지주사가 보유한 코빗 지분 60.5%와 SK플래닛이 보유한 31.5%를 각각 인수해 총 92.06%의 지분을 1335억원에 취득했다고 공시했다.
인수 주체를 금융 계열사가 아닌 비금융 계열사 미래에셋컨설팅으로 설정한 것이 눈에 띈다. 금융회사의 가상자산 사업 참여를 제한하는 ‘금가 분리’를 우회하려던 포석으로 풀이된다. 현재 공정거래위원회의 기업결합 심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금융위원회 인가 절차도 남아 있다.
미래에셋그룹이 코빗 인수에 나선 배경에는 ‘3.0 전략’이 있다고 금융업계는 보고 있다. 펀드 판매 중심의 1.0시대, 글로벌·상장지수펀드(ETF) 확장의 2.0시대를 지나, 이제는 디지털자산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성장 축을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라고 한다. 증권사를 넘어, 디지털자산 거래 플랫폼 회사로 변모하려는 미래에셋의 의지가 코빗 인수에 녹아있다는 분석이다.
코빗은 2013년 설립된 국내 첫 번째 VASP로, 현재 시장 점유율 4위를 유지하고 있다. 업비트·빗썸의 양강 구도 속에서 점유율은 미미하지만, VASP 라이선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핵심 자산이다. 금융당국이 추가 VASP 신규 인가를 사실상 막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라이선스 보유사를 인수하는 것이 시장 진입의 유일한 현실적 경로이기 때문이다.
한투, OKX와 코인원 공동 인수 추진… 글로벌 VASP 재상륙 신호탄
한국투자증권은 글로벌 VASP인 OKX와 손잡고 코인원 지분을 각각 20%씩 공동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OKX는 바이낸스·코인베이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거래소다.
양사는 기존 주주의 구주 매각과 코인원의 신주 발행을 결합한 방식으로 각각 20% 수준의 지분을 확보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전해졌다. 신주 발행 중심 구조는 코인원에 외부 자금을 직접 유입시키는 동시에, 경영권 변동 없이 재무적 투자(FI) 성격을 유지하기 위한 선택이다.
현재 코인원의 주요 주주는 더원그룹(34.30%), 컴투스홀딩스(21.95%), 차명훈 대표이사(19.14%), 컴투스플러스(16.47%) 등이다. 코인원 창업자인 차 대표가 더원그룹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차 대표가 본인 지분율을 30% 초반으로 낮추는 방향에서 딜이 설계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당국이 추진 중인 ‘VASP 대주주 지분 제한’ 규제에 선제 대응하면서도 경영권은 유지하려는 포석이다.
한국투자증권의 참여는 ‘금산분리’ 규정에 따라 금융회사가 비금융회사 지분을 20%까지 금융위원회 신고 후 확보할 수 있는 상한선을 감안한 설계다. 직접 경쟁사인 미래에셋그룹의 코빗 인수에 대응해 코인원 인수전에 뛰어든 것. 지난 4월 초부터 금융당국과 정치권 설득 작업을 병행해 왔다고 전해진다.
업계 관계자는 “OKX의 코인원 지분 인수가 현실화할 경우, 2022년 바이낸스의 고팍스 지분 인수에 이어 글로벌 VASP가 국내 원화 가상자산 거래소의 지분 확보에 나서는 두 번째 사례가 된다”며 “국내 VASP 시장의 합종연횡이 해외로 확장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OKX 측의 의도에 대해서는 업계의 시각이 나뉜다. 단순 재무 투자에 그칠 수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OKX가 비트코인 선물 기준 세계 2위 파생상품 거래소로서 보유한 고도의 매칭 엔진과 리스크 관리 시스템을 코인원에 이식해 실질적 영향력을 확보하려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인원 측은 “복수 기업과 전략적 지분 투자 등 파트너십을 논의 중이나 현재 확정된 사항은 없다”며 “경영권을 전제로 한 투자 협상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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