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유로화가 달러의 ‘안전자산 독점’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원화 스테이블코인에 대해서도 주어지는 질문이다.
유럽이 별도의 재정통합 조약 없이도 ‘유로존 국채를 기초자산으로 한 스테이블코인’과 유럽중앙은행(ECB)의 디지털 결제 인프라를 결합해 ‘사실상의 유로존 안전자산’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기고를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게재해 주목받고 있다.
스테이트스트리트 투자운용의 엘리엇 헨토브 수석매크로전략가와 디지털통화연구소 존 오처드 소장이 공동 집필한 이 기고문의 요지는 이렇다. 유로 스테이블코인을, 유로존 국채를 투명한 규칙에 따라 분산 편입한 준비자산 바스켓 위에 발행하자는 것. 유로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기 위해, 스테이블코인을 유로존의 ‘합성 안전 자산’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약 개정이나 공동 재무부 설립 등 재정 통합 없이도 시장이 원하는 ‘단일하고 신용이 분산된 디지털 안전자산’을 만들 수 있다는 주장이다. 필자들은 이를 “공동 책임 없는 분산투자”이자 “공공부채를 감싸는 민간의 포장지”라고 표현했다.
FT에 따르면, 유럽의 경제 규모는 그동안 금융 권력으로 완전히 치환되지 못했다. 유로는 세계 제2의 기축통화다. 하지만, 달러의 지배력을 뒷받침하는 시장의 깊이, 유동성, 그리고 독보적인 ‘안전 자산’ 지위를 갖추지는 못했다. 분절된 자본 시장과 유로존 차원의 공통 국채 부재는 유로화의 국제적 역할을 계속해서 제한해 왔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지금 달러 의존도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 유럽은 정부 채권과 같은 실물 자산에 가치가 고정된 디지털 자산인 ‘스테이블코인’에서 과소평가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유로존은 도매형 토큰화 금융(wholesale tokenised finance) 분야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제도적 인프라를 조용히 구축 중이라는 것. 특정 유로 표시 스테이블코인을 장려하는 것은 유럽의 금융 구조를 강화하고, 실질적으로는 독일 등이 강력히 반대해 온 재정 통합(fiscal mutualisation) 없이도 유로존 안전 자산과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첫 번째 메커니즘은 구조적 접근이다. 유로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을 유로존 정부 채권으로 구성된 투명한 바스켓에 투자한다면, 시장은 다양한 국가의 부채가 혼합된 단일 디지털 자산을 얻게 된다. 이는 공동 책임 없이도 다각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즉, 조약 개정이나 공통 재무부, 재정 이전 없이도 공공 부채를 민간 금융 상품으로 감싸는 ‘민간 포장(private wrapper)’ 효과를 낼 수 있다고 FT는 밝혔다.
준비금 배분은 유로존 중앙은행들이 이미 사용하는 자산 매입 방식을 따라, 특정 국가의 채권에 과도하게 집중되지 않도록 조절할 수 있다. 이는 곧바로 국채 금리 차(spread)를 없애거나 미국 국채를 완벽히 대체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광범위한 유로존 정부 부채를 기초 자산으로 하는 확장성 있는 디지털 도구를 만들어 ‘합성 안전 자산(synthetic safe asset)’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할 것이라고 FT는 말했다.
두 번째 메커니즘은 규모의 경제다. 현재 유로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시장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디지털 금융 내 달러의 유동성 프리미엄을 공고히 하고 있다. 그러나 유동성은 상호 반사적이다. 만약 유로 스테이블코인이 온체인 결제 및 토큰화 증권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면, 그 프리미엄의 일부가 유로화로 이동할 수 있다고 FT는 보고 있다.
성장은 기계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스테이블코인 준비금은 투자돼야 한다. 유로 토큰으로 결제되는 글로벌 거래 비중이 커지면, 이는 유로존 국채에 대한 구조적으로 높은 수요로 이어질 것이다.
유럽은 예상치 못한 강점도 가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유로존 은행들이 중앙은행 화폐로 토큰화 거래를 결제할 수 있는 인프라를 준비 중이다. 이는 토큰화된 다양한 자산의 결제를 동기화하여 도매 시장의 핵심에 신뢰를 심어줄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규제된 유로 스테이블코인은 공적 화폐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애플리케이션 계층에서 현금과 같은 도구로 기능하고, 도매형 디지털 중앙은행 화폐는 최종 결제를 보장한다. 유럽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민간 토큰 사이의 이분법적 선택을 강요하는 대신, 다양한 규제 디지털 화폐가 공존하는 생태계로 향하고 있다. 이는 오직 민간 화폐에 의존하는 미국식 접근법과 대조된다.
물론 상당한 장애물도 남아 있다. 현재의 미카(MiCA. 유럽 가상자산시장법) 규제 하에서는 시스템적으로 중요한 유로 스테이블코인은 준비금의 상당 부분을 은행 예금으로 보유해야 한다. 이는 금융 안정을 위한 것이지만,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국채 기반 스테이블코인보다 취약할 수 있다.
수익률 부족도 한계다. 스테이블코인은 보통 보유자에게 이자를 지급하지 않는다. 소매 사용자에게는 괜찮을지 몰라도, 기관 투자자에게는 매력이 떨어진다. 이자 지급이 없는 한 공식적인 기관 투자자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선호할 이유는 적다. 수익률을 부분적으로 이전하거나 토큰화된 머니마켓펀드(MMF)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를 개선할 수 있다.
유럽이 스테이블코인 정책을 지엽적인 규제안이 아닌 전략적 수단으로 인식한다면, 경제 규모와 금융 영향력 사이의 오랜 간극을 좁힐 수 있을 것이라고 FT는 강조했다. 그리고 유로존 안전 자산을 향한 길은 조약 개정뿐만 아니라 ‘코드(기술)’를 통해서도 열릴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