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시집 ‘늦게 가는 시계’] 관촌수필 떠오르는 서정적 인간미

이국형 시인, 삶을 반추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토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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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리’
             이국형

잔설 녹는 솔잎마다
물방울로 매달리던 하늘

반쯤 가린 논 허리를
가로로 내달리던 장맛비

먼 일갓집 돌담 너머
등처럼 내걸리던 홍시

귀 없는 송사리처럼
살얼음 밑으로 숨어들기만 했던
내 열아홉 살의 겨울

거기가 고향이라던
산수국을 닮은 소녀


‘연
             이국형

백일을 살다가
세상과 연이 끊겼다는 누이는

푸른 담쟁이가 오르는
돌무더기에 묻혔다

푸른 담쟁이가
석영처럼

붉어졌다 멀어지기를
내 나이만큼 하는 동안에도

나는 질마재 너머
청라에 가본 적이 없다


이국형 시인의 시는 이문구 소설가의 관촌수필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 두 사람이 살아온 시대는 조금 차이가 있어도 시골의 정서가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문구(1941~2003) 소설가의 고향은 보령시 대관동(대천1동)이다. 이국형(1965~) 시인은 바로 옆 주교면 신대리다.   

이승하 중앙대 교수는 “사계절 풍경을 딱 4개 연으로 완벽하게 그리고 있다”고 칭찬했다. 

그는 “시집 축하 글을 쓰기 위해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다시 읽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관촌수필 “기별 못하고 찾은 고향에서 먼 집안 형수뻘 되는 이가 서둘러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느낌”이라는 대목까지 상기시켰다.

▲이국형 시인


최근 ‘늦게 가는 시계’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간한 이국형 시인은 2019년 계간 ‘애지’로 등단했다. 

현재 한국투자부동산신탁㈜ 대표인 그는 부동산박사답지 않게 서정적인 인간미가 넘친다. 삶을 반추하면서 깨닫음의 토로여서 감정이입이 예사롭지 않다. 

구조조정을 얘기한 ‘구절초가 구절초에게’, ‘퇴사’에서는 아픔 너머 또 다른 ‘마을’이 떠오른다.

오창규 기자 chang@data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