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명세서, 휴대전화 요금 납부 내역, 온라인 쇼핑 결제 기록....
얼핏 대출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 데이터가 이제 은행 대출 심사에서 핵심 변수로 부상하고 있다. 카카오뱅크·토스뱅크·케이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 3사와 케이비(KB)국민은행·신한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들이 ‘대안신용평가모형(Alternative Credit Scoring)’ 고도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대안신용평가란 기존의 금융거래 이력(연체·상환 실적, 카드·대출 보유 여부) 중심 평가를 넘어, 비금융 데이터까지 포괄해 차주의 상환능력을 다차원적으로 측정하는 방식이다. 금융이력이 부족한 사회초년생·주부·프리랜서·자영업자 등 이른바 ‘씬파일러(Thin Filer)’에게 새로운 신용 기회를 여는 것이 핵심 목적이다.
국내 씬파일러는 지난 4월 말 기준 신용 평가 대상자 4978만명 가운데 1246만명(25%)에 달한다.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신용 평가 기관인 나이스평가정보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아직 본격적으로 경제 활동을 시작하기 전인 20대 이하에서 신 파일러 비율이 47.6%로 가장 높았다. 이 다음으로 신파일러 비중이 높은 연령대는 60대 이상(27.1%), 30대(23%) 순이었다.
은행권 관계자는 “AI 시대의 금융 경쟁력은 결국 데이터”라며 “비금융 데이터까지 활용해 누가 더 정교하게 고객의 미래 상환능력을 예측하느냐가 향후 은행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카카오뱅크는 비금융 데이터로만 구성된 독자적 대안신용평가모형 ‘카카오뱅크스코어’를 통해 2023년 이후 누적 1조2000억 원 규모의 중·저신용 대출을 추가 공급했다. 이 모형을 적용하지 않았다면 거절 대상이었을 차주에게 승인이 이뤄진 규모가 전체 중·저신용 취급액의 약 12%에 달한다는 설명이다.
카카오뱅크스코어는 2022년 하반기 업계 최초로, 카카오 관계사들과 롯데멤버스·교보문고·금융결제원 등 8개 기관의 소비·이동·납부 데이터를 가명 결합해 설계됐다. 현재는 일반 대안신용평가 외에 음식점업·서비스업·온라인셀러 등 업종 특화 모델을 포함해 총 5개의 대안 신용평가 모델 체계를 갖추고 있다. 카카오뱅크는 이 모형을 외부 금융사 대상으로도 개방해 활용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토스뱅크는 머신러닝 기반 자체 신용평가 시스템인 ‘토스 스코어링 시스템(TSS·Toss Scoring System)’로 포용금융 전선을 이끌고 있다. TSS는 2900만 토스 앱 이용자의 금융·비금융 데이터를 학습한 AI 모형이다. 생활요금 자동이체·소비 성향·납부 일관성 등 실질 현금흐름을 분석해 차주의 ‘성실 신호’를 포착한다.
토스뱅크에 따르면 기존 신용평가사(CB) 기준 중·저신용자의 약 20%가 TSS를 통해 고신용자로 재평가됐다. 이로 인해 약 10만 명이 새로이 1금융권 대출을 이용하게 됐다. 출범 이후 토스뱅크가 지원한 중·저신용자 누적 대출 규모는 9조6000억 원에 달한다.
토스뱅크의 2025년 1분기 중·저신용자 대출 비중은 34.75%로 목표치(32%)를 상회했다. 특히 1분기 중·저신용 차주의 35%가 TSS 대안정보모형을 통해 가점을 받았다. 35세 미만 청년층은 그 비율이 72%까지 치솟았다. 대출 실행 후 1개월 이내에 신용점수가 평균 43점 상승한 고객 비중도 46%에 달해 ‘포용금융→신용 회복’의 선순환 효과도 확인됐다.
케이뱅크는 올해 4월 인터넷은행 최초로 통신 빅데이터 기반 대안신용평가 서비스 ‘이퀄(EQUAL)’을 도입, 평가 체계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퀄은 케이티·에스케이텔레콤·엘지유플러스 등 통신 3사와 케이씨비·에스지아이 서울보증이 공동 출자해 만든 모형이다. 국내 통신 가입자 약 4800만 명의 요금납부 내역·데이터 사용량·멤버십 이용 행태 등 500개 이상 항목을 정밀 분석한다.
케이뱅크는 이퀄에 더해, 기존 네이버페이 스코어, 비씨·삼성·신한카드의 가맹점 데이터, 자체 신용평가모형 ‘씨에스에스 3.0’까지 아우르는 입체적 대안신용평가 체계를 구축했다. 케이뱅크의 중·저신용자 대출 공급액은 2025년 2분기 누적 기준 7조 원을 넘어섰다.
시중은행들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자체 알뜰폰 서비스인 ‘KB 리브모바일(Liiv M)’의 통신 데이터를 활용한 대안신용평가모델을 개발해 적용 중이다. 금융거래 이력이 적은 사회초년생·주부·은퇴자 등은 ‘KB처음 이지 신용대출’ 신청 시, 청구·수납·미납 등 통신 데이터를 기반으로 보다 정교한 심사를 받을 수 있다.
신한은행은 개인사업자 대상 대출 심사에 네이버페이 스코어를 결합해 활용 중이다. 엔에이치(NH)농협은행도 네이버페이와 전략적 양해각서(MOU)를 맺고, 데이터 기반 맞춤형 금융 상품 개발에 나섰다.
전문가들은 ‘마이데이터 2.0(통신·공과금 등 비금융 정보까지 개인 주도로 통합·이동할 수 있도록 제도 기반을 넓힌 마이데이터 고도화 계획)’ 확대와 AI 분석 기술 고도화가 맞물리며 대안신용평가의 활용 범위가 더욱 넓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한 인터넷전문은행 고위관계자는 “금융의 본질은 결국 정보인데, AI가 정보 판단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며 “AI가 차주의 상황 변화를 실시간에 가깝게 파악하게 되면서, 금융도 훨씬 개인 맞춤형으로 돼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개인정보 활용 범위 확대와 알고리즘 공정성 검증, 원칙 중심의 규제 체계 전환 등 해결 과제도 남아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는 “대안신용평가가 적시성·포용성·정확도에서 기존 모형을 보완할 수 있지만, 데이터 확보 방식의 투명성과 프라이버시 보호가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고 분석했다. 원칙 중심·위험 기반 규제 전환 논의도 병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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