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인터넷은행 레볼루트(Revolut)가 유럽 금융산업의 판을 흔들고 있다.
단순한 모바일 결제·환전 서비스에서 출발한 레볼루트는 이제 은행 라이선스를 기반으로 대출·투자·자산관리까지 아우르는 ‘금융 슈퍼 앱’으로 변신하고 있다. 레볼루트는 최근 기업가치가 1150억 달러(약 157조 2740억 원)까지 치솟아, 홍콩상하이뱅크(HSBC)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은행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레볼루트는 이제 초기 단계였던 신용사업을 ‘종합은행(full-service bank)’으로 확대하려 한다. 항공업계에서 라이언에어가 기존 질서를 흔든 것처럼, 은행산업을 뒤흔들겠다는 것이다. 레볼루트는 △자산관리업체와 경쟁할 프라이빗뱅크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고객을 빼앗아올 각종 라이프스타일 혜택 △기존 은행보다 저렴한 결제 서비스 등을 하나의 플랫폼 안에 제공하려 한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유럽 은행산업에 상당한 구조적 충격을 줄 수 있다고 FT는 보고 있다.
전통 금융권도 레볼루트의 성장세에 긴장하고 있다. 현재 40개국에서 8000만 명 이상의 고객을 확보한 레볼루트에 대해 제이피모건의 최고경영자 제이미 다이먼조차 “질투가 난다”고 말할 정도라고 FT는 밝혔다. 다이먼은 레볼루트 등 신생 금융기업을 지켜보고, 기존 은행도 “더 빠르고 더 나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FT에 따르면, 레볼루트의 가장 큰 특징은 기존 은행과 다른 사업모델이다. 영국 대형 은행들은 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이인 순이자마진에 수익을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레볼루트는 지난해 45억 파운드(약 8조 3106억 4500만 원) 매출의 약 3/4을 환전·가상자산·카드결제·프리미엄 구독 등 수수료 사업에서 벌어들였다. 반면, 순이자마진은 10억 파운드(약 1조 8427억 7000만 원) 미만이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어떤 하나의 사업부문도 전체 매출의 20%를 크게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정 사업 하나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 금리 변동에도 상대적으로 강한 구조다.
이 회사가 노리는 것은 ‘은행’ 그 자체를 넘어선다고 FT는 분석했다. 레볼루트는 알리페이와 위쳇처럼, 결제서비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결제 플랫폼에서 출발했지만, 하나의 앱 위에 다양한 서비스를 계속 얹어 이용자들이 여러 금융·생활 서비스를 이용하도록 했다. 투자·자산관리·생활서비스 등을 결합하는 ‘에브리씽 앱(everything app)’을 지향하고 있다. 레볼루트는 내년에는 비상장시장 투자 서비스를 추진하고, 영국에서 프라이빗뱅크도 선보일 계획이다.
FT에 따르면, 창업자 닉 스토론스키(Nik Storonsky)가 이끄는 조직문화 역시 기존 금융사와 다르다. 직원들에게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해, 이심(eSIM)과 가상자산 거래 등 새로운 상품을 빠르게 내놓았다. 내부에서는 이를 ‘해군’보다 ‘해적’에 가까운 조직이라고 표현한다. 빠르게 움직이면서 기회를 잡는 것이 성장의 핵심이었다는 것.
레볼루트의 속도는 창업 초기부터 이 회사 디엔에이에 내재돼 있었다. 러시아 태생인 스토론스키는 전직 수영 챔피언 출신으로, 2015년 전통 은행들이 해외여행 고객에게 부과하는 높은 환전 수수료에 불만을 느껴 레볼루트를 창업하게 됐다.
레볼루트는 곧 세련된 모바일 앱과 저렴한 환전 수수료로 젊은 고객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광고보다 입소문(word of mouth)을 통해 고객이 급속하게 늘어난 것이 특징이었다.
하지만 레볼루트가 이제 ‘해적’에서 ‘은행’으로 변신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고 FT는 보고 있다. 규제와 속도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레볼루트는 한때 은행 라이선스를 피해, 전자화폐·외환·결제 라이선스 등을 활용해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스토론스키는 나중에 이를 “기초적인 실수”라고 인정했다. 영국 은행 라이선스 취득 과정에서, 매출 검증 문제와 내부통제 및 리스크 관리에 대한 규제당국의 우려가 불거진 것이다. 이 회사는 이사회 확대와 컴플라이언스·리스크 인력 확충 등 대대적인 조직 개편에 나섰다.
지난 3월 마침내 영국의 정식 은행 라이선스를 확보했다. 다른 국가들의 규제당국도 잇따라 면허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레볼루트는 고객 예금을 받아 이를 대출 재원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험대라는 평가가 나온다. 은행이 된다는 것은 고객 예금을 받아 대출하는 사업을 본격화해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레볼루트의 지난해 신용 포트폴리오는 22억 파운드(약 4조 645억 6600만 원)였다. 전년보다 두 배 이상 늘었지만, 아직 규모가 작다. 이 회사가 대규모 대출사업을 위해 필요한 여신심사 전문성, 신용 인프라, 규제자본을 갖추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다고 제이피모건은 분석했다. 대출 확대는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피해왔던 신용위험을 본격적으로 떠안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레볼루트 앞에는 ‘신뢰’라는 벽이 놓여 있다고 FT는 진단했다. 씨티뱅크 분석에 따르면, 레볼루트의 평균 예금액은 영국 4대 은행보다 훨씬 적고, 월급이 입금되는 주거래계좌로 사용하는 고객도 상대적으로 적다. 소비자단체 ‘위치?(Which?)’가 금융 옴부즈맨 서비스 자료를 분석한 결과, 2025년 1~8월 레볼루트 고객이 제기한 사기 관련 사건은 1875건으로 은행·핀테크 가운데 가장 많았다.
규제 강화가 레볼루트의 최대 강점인 ‘속도’를 떨어뜨릴 가능성도 있다고 FT는 말했다. 레볼루트는 2030년까지 100억 파운드(약 18조 4699억 원)를 투입해 30개 신규 시장에 진출한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시장이 늘어날수록, 국가별 금융규제와 내부통제, 리스크 관리 비용도 함께 증가한다. 실제 유럽중앙은행은 지난해 레볼루트의 유럽 사업에서 내부통제와 리스크 관리에 ‘결함’을 발견하고, 성장 제한 조치를 내렸다.
그럼에도 투자자들은 레볼루트의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다. 유럽 시장에서 아직 사용자 침투율이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국가가 대부분이고, 고객 1인당 매출 역시 크게 늘릴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레볼루트가 장기적으로 기업가치 1조 달러(약 1368조 1000억 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투자자 일각에서 나온다.
레볼루트 내부에서는 더 이상 회사를 단순한 은행으로 보지 않는다. 한 임원은 “테크기업”이라며, 미국의 아마존과 같은 기업을 비교 대상으로 꼽았다. 은행이라는 규제산업의 틀 안에서 움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금융을 기술 플랫폼 위에 올려놓는 빅테크 기업을 꿈꾸고 있다는 의미다.
결국 레볼루트의 실험은 금융산업의 미래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고 FT는 설명했다. ‘은행이 기술회사가 되는 것’과 ‘기술회사가 은행이 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금융의 주도권을 가져갈 것인가라는 것.
레볼루트는 지금 그 경계에 서 있다고 FT는 보고 있다. 성공한다면, 유럽 은행산업의 경쟁방식 자체를 바꿀 수 있다. 그러나 빠른 혁신과 금융규제, 고객 신뢰를 동시에 잡지 못한다면, 지금까지의 성장 공식이 오히려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핵심은 결국 하나다. 레볼루트가 ‘해적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은행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느냐라고 FT는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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