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뮬레이션이 벤처투자 바꿔…“SW 대신, 핵융합·우주·뇌로”

FT, “닷컴 버블 이후 ‘안전’ 좇던 VC들, SpaceX 대박 뒤 다시 딥 테크 ‘문샷 투자’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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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원조 벤처캐피털(VC)이 철도를 깔았다. 엉뚱해 보이는 거대한 목표에 돈을 거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진정한 마법이다.” 일론 머스크와 함께 뇌-컴퓨터 인터페이스(BCI) 기업 뉴럴링크를 창업했던 맥스 호닥 '사이언스' 대표의 말이다.

실리콘밸리의 자금줄인 벤처캐피털들이 다시 ‘위험한 도박’에 나서고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지난 20여 년간 실리콘밸리를 지배했던 비투비(B2B) 소프트웨어나 스마트폰 앱 중심의 안전한 투자에서 벗어났다. 핵융합, 우주 전력망, 뇌 임플란트 등 과거 ‘공상과학(SF)’으로 치부되던 거대 공학 프로젝트, 이른바 ‘문샷(Moonshot·거대한 도전)’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FT에 따르면, 데이터 분석업체 딜룸(Dealroom) 집계를 기준으로 인공지능(AI) 스타트업 투자를 제외한 글로벌 ‘딥테크(deep tech·고도의 과학·공학 기반 기술)’ 투자액은 2024년 이후 누적 1500억 달러(약 204조 7800억 원)를 넘어섰다. 이는 2019년까지의 10년간 누적 투자액(1330억 달러·181조 5716억 원)을 이미 웃도는 수준이다.

벤처캐피털 액셀(Accel)의 매트 로빈슨 파트너는 최근 몇 년 사이 투자사 내부에서 논의되는 기업의 성격 자체가 달라졌다고 FT에 밝혔다. 닷컴버블 붕괴 이후 VC 업계는 예측 가능한 수익 모델을 갖춘 기업용 소프트웨어 기업 위주로 투자를 집중해왔는데, 이 흐름이 뒤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 어려워서 불가능하다’며 던져두었던 아이디어들이 이제는 AI 덕분에 모두 ‘해볼 만한 도전’으로 바뀌었다”며 그는 실리콘밸리의 판도 변화를 증언했다.

맥스 호닥은, 인터넷이 급성장하던 시기 소프트웨어 투자가 하드웨어 벤처의 ‘산소를 빨아들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이 오히려 ‘원래의 벤처캐피털’로 돌아가는 흐름이라고 말했다.

AI 시뮬레이션이 낮춘 ‘HW 투자의 문턱’
딥테크 투자 확산의 배경에는 AI 기술 자체가 있다. AI 기반 시뮬레이션 기술이 발전하면서, 핵융합·우주 기술 등 분야의 실험 비용이 크게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실험에 앞서 디지털 환경에서 먼저 검증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지면서, 하드웨어 벤처 특유의 막대한 초기 자본 부담이 완화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런던 소재 VC ‘플루럴’의 카리나 나미흐 투자자는 이런 변화로 인해, 딥테크 분야에서 수익을 내는 데 필요한 자본 집약도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구글 ‘X랩’이 남긴 교훈… 성공과 실패 공존
FT에 따르면, 문샷 투자의 원조 격인 알파벳(구글 모회사)의 연구개발(R&D) 자회사 ‘엑스(X)’는 10여년 전부터 기존 투자자들이 꺼리는 장기 프로젝트를 육성해왔다. 자율주행 기업 웨이모(현재 기업가치 1260억 달러·약 172조 278억 원)라는 성공 사례가 있다. 반면, 고고도 풍선으로 오지에 인터넷을 보급하려던 프로젝트 ‘룬(Loon)’은 2021년 사업을 접었다.

다만 X랩 역시 최근에는 사업성과 기술적 타당성을 더 꼼꼼히 검토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자연재해 예측을 위한 AI 기반 시스템 ‘벨웨더(Bellwether)’ 등 최신 프로젝트에서 이런 변화가 감지된다고 FT는 설명했다.

우주산업 투자 열기의 배경에는 스페이스X의 존재감이 크다. 벤처캐피털 파운더스 펀드는 스페이스X에 약 6억 달러(약 8188억 2000만 원)를 투자해, 기업공개(IPO) 시점 기준 500억 달러(약 68조 2350억 원) 이상의 지분가치를 확보한 것으로 피치북(PitchBook)은 추산했다.

우주 건축 연구소 오렐리아 인스티튜트의 아리엘 에크블로 대표는 초기 투자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투자자들의 ‘포모(FOMO·소외 공포)’ 심리가 우주 스타트업의 ‘캄브리아기 대폭발(Cambrian explosion)’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발사 비용 하락이 에너지·우주 제조업 등 새로운 응용 분야를 열 것으로 내다봤다. 궤도상 태양광을 지구로 반사·전송하는 기술이 야간에도 활용 가능한 고효율 친환경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우주 궤도에 거대한 거울을 띄워 지구로 태양광을 반사하는 스타트업 ‘리플렉트 오비탈’이나 △우주 전력망을 구축하는 ‘스타 캐처’ 등 황당무계해 보이는 기업에 거액의 자금이 쇄도하고 있다.

여기에 AI 시뮬레이션 기술 발전이 기름을 부었다. 과거 물리적 실험에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던 핵융합이나 우주 공학 분야에서, AI가 가상 시뮬레이션(In silico)을 통해 실패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SW업계엔 위기감… “AI 모델에 통째로 먹힐 수도”
반면, 전통 소프트웨어 업계에는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AI가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사업을 보호하기 위해 구축해온 ‘해자(moat)’, 즉 경쟁사가 쉽게 따라오기 어려운 진입장벽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많은 기술 투자자들은 벤처캐피털 자체도 기술산업의 새로운 시대에 맞춰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이른바 ‘사스포칼립스(SaaSpocalypse·서비스로서의 소프트웨어 대붕괴’로 관련 기업들의 시가총액 수천억 달러(수백조 원)가 증발했다. 다만 지난달 세일즈포스닷컴 등의 실적 발표에서 AI발(發) 실적 개선 기대감이 확인되며, 손실 일부는 회복된 것으로 전해졌다.

라이트스피드 벤처 파트너스의 베줄 소마이아 파트너는 앤트로픽 등 AI 모델 기업이 기존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담당하던 시장 상당 부분을 잠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소프트웨어 전용 사업의 지속가능성과 차별성을 판단하는 일이 현재 가장 어려운 과제 중 하나가 됐다고 밝혔다.

제너럴 카탈리스트의 헤만트 타네자 대표는 지난 7월 기고문에서, 업종을 막론하고 과거에 통용되던 ‘터미널 밸류(장기 존속가치)’ 개념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며, 이제 창업자들은 과거보다 훨씬 큰 규모의 기업을 만들어야만 의미 있는 성과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무모해 보였던 문샷은 실제로 성공했다”
FT에 따르면, 시력 회복용 망막 임플란트 제품 출시를 앞둔 맥스 호닥은 ‘문샷’이라는 표현 자체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는 “무모해 보인다고 해서 실패한다는 뜻은 아니다”라며, 인류의 첫 달 탐사 프로젝트(문샷) 역시 실제로는 성공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권선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