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블코인이 결제와 송금뿐 아니라, 대출·예치(Staking)·토큰화 자산 투자 등으로 사용처를 크게 불리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을 맡기면 최고 연 20%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이른바 ‘크립토 볼트(Crypto Vault·가상자산 금고)’ 시장이 1년여 만에 2.5배나 급증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크립토 볼트는 탈중앙화금융(DeFi·디파이)의 새로운 투자 수단으로, 투자자가 보유한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수익을 낸다. 은행이나 증권사 같은 전통적인 금융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고 블록체인상의 스마트 계약으로 거래가 이뤄진다. ‘큐레이터(Curator)’라는 운용자가 전략과 위험 한도를 정하고 수수료를 받는다는 점에서, 펀드와 사실상 같다고 지적된다.
크립토 볼트는 하지만 담보 가치가 급락하거나 스마트 계약에 오류가 발생하면, 투자자 자산이 순식간에 청산될 수 있다. 국내 은행과 핀테크 기업이 추진중인 원화 스테이블코인 역시, 도입되면 이 크립토 볼트 시장으로 대거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
코인 고수익 좇아 커지는 ‘크립토 볼트’
FT에 따르면, 디지털 토큰을 대출하는 새로운 방식이 수십억 달러(수 조원) 규모의 가상자산을 크립토 시장의 위험한 영역으로 유입시키고 있다. 이에 미국과 유럽의 금융 규제당국은 이 시장을 더 면밀하게 감독할 필요가 있는지 검토하고 있다.
크립토 볼트에 예치된 자금은 지난해 초 40억 달러(약 5조 2948억 원)에서 100억 달러(약 13조 2370억 원)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데이터 분석업체인 블록웍스는 밝혔다. 디지털 자산 보유자들이 자신이 보유한 스테이블코인을 거래자들에게 빌려주고, 고수익을 얻으려 하기 때문이라는 것. 디파이(DeFi·탈중앙화금융) 대출의 다른 형태와 마찬가지로, 크립토 볼트는 중개기관을 거치지 않고, 스마트 계약을 활용해 탈중앙화 플랫폼에서 운영된다.
하지만 크립토 볼트에는 일반적인 디파이 대출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각 볼트에는 이른바 큐레이터가 존재한다는 것. 큐레이터는 펀드매니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이들은 △투자전략을 선택하고, △위험관리 기준을 설정하며, △수수료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큐레이터의 투자전략은 토큰을 대출하거나 예치해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수익률은 대체로 3~10% 수준으로, 다른 디파이 대출상품보다 높다. 위험성이 더 큰 전략의 경우, 20% 이상의 수익률을 제시하기도 한다.
과거 가상자산 대출업체의 붕괴 재현 우려
그러나 대출형 크립토 볼트의 확산으로 가상자산 시장에서, 위험성이 높은 비규제 영역에 자금이 이동되고 있다고 업계 일각에서는 우려한다. 2022년에는 위험한 대출과 고객들의 대규모 인출로 인해, 가상자산 대출업체인 △보이저 디지털, △셀시우스, △제네시스가 잇따라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전례가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대출 수단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투자자를 보호해 줄 시장 중개기관은 이 시장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담보 가치가 하락하거나 정해진 위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투자자의 자산은 자동으로 청산될 수 있다.
가상자산 연구업체인 카이코의 디지털 자산 부문 책임자 레오폴드 벵거는 이렇게 말했다. “매우 위험하다.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는 모든 정보가 공개돼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 계약에 코드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은 담보비율이나 유동성 비율을 읽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그저 이자율만 살펴볼 뿐이다.”
지갑 연결하면 이자 받는 새 투자 방식
대출형 볼트는 일부 투자자들이 비밀번호와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사용하는 보안용 금고와는 다르다. 대출형 볼트는 투자자가 자신의 가상자산 지갑을 플랫폼에 연결하고, 원하는 투자전략을 선택해 토큰을 예치할 수 있도록 한다. 투자자는 예치한 자산에서 발생하는 이자를 거의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다.
지지자들은 크립토 볼트가 가상자산 산업의 새로운 진화 단계라고 주장한다. 주식이나 펀드와 같은 전통적인 자산이 토큰화돼 블록체인에서 거래되는 사례가 늘어날수록, 크립토 볼트는 이러한 자산을 활용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현재 핀테크 기업 가운데 △스테이블코인 잔액을 대규모로 보유한 기업, △디지털 자산을 재무자산으로 보유하는 기업, △헤지펀드 등이 볼트의 주요 예치자다. 이는 스테이크하우스 파이낸셜(Steakhouse Financial)의 공동 창업자이자 가장 큰 볼트 큐레이터인 애드리언 카치네로 바실레비치의 설명이다.
위기 때 자동청산이 시장의 하락 증폭
볼트는 일반적인 디파이 대출보다, 투자자가 자신이 제공하는 담보에 대해 더 많은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볼트에는 자산 포트폴리오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신속하게 청산하는 자동화 장치가 일반적으로 적용된다.
이러한 장치는 시장이 급락할 때 오히려 매도 압력을 키울 수 있다. “스트레스 시나리오에서는 상황이 매우 빠르게 바뀔 수 있다”고 에스앤피(S&P) 글로벌 레이팅스의 디지털 자산 분석 책임자인 앤드루 오닐은 FT에 말했다. 그는 탈중앙화금융에서는 문제가 전통적인 금융시장보다 “훨씬 더 빠르게” 확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전통 금융시장에서는 은행이나 중개기관이 위험을 감지하면 거래를 제한하거나 추가 담보를 요구하는 등 대응할 여지가 있다. 반면 디파이에서는 스마트 계약에 미리 설정된 조건이 충족되면, 청산이 자동으로 실행될 수 있다. 시장 상황이 급변해도, 계약 자체가 상황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응하는 것은 아니다.
해킹과 스마트 계약의 코딩 오류도 위험
해킹 역시 중요한 위험이다. 블록체인 분석업체인 티알엠 랩스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디파이 플랫폼에서 도난당한 자금은 9억7200만 달러(약 1조 2875억 1120만 원)에 달했다.
스마트 계약의 코드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있다. 코드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직면하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3월 탈중앙화 프로토콜 리졸브(Resolv)에서 해킹 사고가 발생해 일부 가상자산 가격이 폭락했다. 당시 유에스알(USR) 토큰은 일부 볼트에서 담보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해당 볼트에는 USR의 가격이 1달러로 고정돼 있었다. 이 때문에 해킹으로 USR의 실제 가격이 급락했는데도, 볼트는 그 가격 하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는 스마트 계약이 외부의 실제 시장가격을 자동으로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FT는 짚었다. 계약에 특정 가격을 고정해 놓거나 부정확한 가격정보를 활용하면, 담보가치가 이미 무너졌는데도 시스템은 담보가 정상적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담보 구조와 유동성 부족이 문제
볼트가 제공하는 대출전략은 복잡할 수 있다. 담보로 사용되는 토큰의 유동성이 부족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탈중앙화 플랫폼인 모포(Morpho)에서 인기가 높은 볼트 가운데 하나는, 유에스디지(USDG) 스테이블코인을 대출해 주는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토큰을 담보로 인정한다. 여기에는 국가의 법정화폐를 담보로 하지 않고 다른 가상자산 토큰으로 뒷받침되는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된 사모신용 자산 묶음의 가격을 추종하는 코인이 포함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담보자산 자체가 다시 다른 가상자산이나 복잡한 금융자산에 의존할 수 있다. 담보자산의 가치가 하락하거나 거래할 시장이 사라지면, 명목상 담보가 충분하더라도 실제로 대출금을 회수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 FT의 지적이다. 특히 여러 단계의 토큰과 담보가 연결된 구조에서는, 한 자산의 문제가 다른 자산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미국과 유럽, 크립토 볼트 규제 검토 착수
FT에 따르면, 규제당국은 이미 크립토 볼트 관련 활동에 감독이 필요한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지난 7월 크립토 볼트가 어떤 경우에 증권법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지 살펴보고 있다고 밝혔다.
“증권을 보유하거나 증권 투자에 자산을 배분하는 볼트는 투자회사 규제의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부 볼트는 단위투자신탁과 유사한 기능을 할 수도 있다”고, SEC 위원으로 활동했던 헤스터 피어스(Hester Peirce)는 밝혔다. 그는 이어, “대출전략 역시 미국 연방 증권법과 관련해 상당한 법적 쟁점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증권시장감독청(ESMA)도 지난 9월 규제 방안을 제안했다. 이 방안은 디파이 서비스와 고객 사이에서 거래를 촉진하거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른바 ‘게이트키퍼(Gatekeepers)’를 규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목적은 소비자 보호 위험, 운영 위험, 스마트 계약 위험을 완화하는 것이다. ESMA는 FT에 보낸 설명에서, 가상자산 서비스 제공업체가 고객의 크립토 볼트 접근을 지원하는 경우, 해당 제안이 볼트에도 관련될 수 있다고 밝혔다.
큐레이터가 사실상 펀드매니저라면 규제 대상
미국 로펌 케이힐 고든 앤드 라인델의 파트너 조너선 게일리는 큐레이터의 역할에 주목했다. 자산의 이동을 매일 살펴보고, 투자전략의 매개변수를 지속적으로 조정하는 큐레이터는 전통적인 펀드매니저와 유사한 존재로 간주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그는 설명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금융 규제가 적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업계에 규제 강화는 그러나, 반갑지 않은 소식이다. 업계는 현재 대체로 규제받지 않는 상태에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한 지위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큐레이터에게 가장 큰 위험은 “내일부터 규정을 준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라고 카이코의 벵거는 말했다. 즉, 단순히 스마트 계약을 배포하는 기술적 역할을 넘어 △투자전략을 결정하고 △위험을 관리하며 △수수료를 받는다면, 규제당국이 이들을 사실상 자산운용업자로 판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라고 FT는 강조했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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