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티, 뱅크오브아메리카, 제이피모건 체이스, 모건스탠리, 찰스 슈왑 등 미국 대형 은행들이 고객 계좌에 접근해 금융거래를 수행하는 외부 인공지능(AI) 에이전트에 잇따라 빗장을 내걸었다. AI가 고객을 대신해 더 높은 금리를 찾아 예금을 옮기거나, 고객의 의도와 다르게 돈을 이체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고객이 로그인 정보를 AI에 제공한 뒤 발생한 거래를, 이들 은행이 탐지해 차단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조치의 배경에는 은행의 수익 기반인 저원가 예금이 흔들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와 뉴스 통신사인 로이터 등이 최근 보도했다. 금융업의 중심이 고객의 돈을 보유한 은행으로부터, 고객의 돈을 관리하는 AI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객이 AI에게 “내 현금으로 가장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달라”고 지시하면, AI는 여러 금융기관의 금리와 조건을 비교해 자금을 이동시킬 수 있다. 소비자에게는 이익이지만, 낮은 금리로 예금을 확보해 대출 재원으로 활용하는 은행에는 부담일 수 밖에 없다. 은행은 예금 금리를 올리거나, 수수료 면제·대출금리 우대·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해 고객을 붙잡아야 한다. 이는 순이자마진(NIM)을 압박할 수 있다.
기존 은행은 급여 계좌, 생활비 결제, 카드 사용, 자동이체 등의 편의성을 바탕으로 고객의 자금을 계좌에 묶어둘 수 있었다. 그러나, AI가 여러 은행의 금리와 조건을 상시 비교하면 이러한 전환 비용이 낮아진다. 고객이 요구하는 수익률에 맞춰 자금을 신속히 이동시키는 이른바 ‘예금 이동(deposit sorting)’이 쉬워지는 것이다.
앞으로 고객은 특정 은행 앱을 열지 않고, AI에 “비상금 500만원은 즉시 인출할 수 있게 두고, 나머지는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수익을 높여줘”라고 요청할 수 있다. AI는 예금 금리, 예금자 보호 한도, 인출 조건, 수수료, 만기 등을 비교하고 고객이 허용한 범위에서 자금 배분을 제안하거나 실행하게 된다. 고객에게 어떤 금융상품을 추천할지 결정하는 AI 플랫폼이 은행의 핵심 경쟁자가 된다.
그러나, 고객의 비밀번호를 AI에 넘기는 방식은 계정 탈취, 권한 오남용, 사기 거래의 위험을 높인다. AI가 고객의 지시를 잘못 해석하거나 공격자가 AI의 동작을 조작하는 문제도 발생할 수 있다. 은행은 에이전트별 신원 확인, 고객이 부여한 권한의 범위, 거래 한도, 이상거래 탐지, 실행 기록, 긴급 중단 기능 등을 갖춰야 한다. 특히 조회 권한과 이체 권한을 분리하고, 고액 거래나 새로운 수취인에 대한 송금에는 사람의 추가 승인을 요구하는 방식이 중요해진다.
전문가들은 AI의 금융 접근 차단에 대해, 전면 금지보다 단계별 허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계좌 잔액 조회, 금융상품 비교, 이체 예약, 실제 자금 이동을 구분하고, 거래 규모와 위험도에 따라 권한을 제한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씨티그룹은 “제3자 AI 에이전트나 비서가 고객 계좌에 로그인하거나 당사의 디지털 뱅킹 플랫폼 안에서 직접 거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최근 밝혔다. 이러한 조치는 고객의 계좌와 정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씨티그룹과 뱅크오브아메리카는 고객 계좌에 접근하는 AI 에이전트를 제한하는 미국 은행 대열에 새롭게 합류했다. 은행들은 AI에이전트가 은행 예금을 대규모로 유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를 규제 당국에 제기하고 있다. 이들이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고객의 유휴자금을 다른 계좌로 옮기기 때문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의 브라이언 모이니핸 최고경영자(CEO)도 이 은행이 소비자 예금에 대한 AI 에이전트의 접근을 제한하고 있다고 시사했다. 이 은행은 AI가 승인한 결제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궁극적으로 어느 주체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 판단하기 위한 규약을 마련하고 있다.
모이니핸 CEO는 최근 씨엔비씨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고객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승인할 때, 반드시 사람이 개입해야 한다고 강하게 믿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AI 에이전트 제공업체들과 협의하고 있다며 “소비자가 나중에 은행에 와서 ‘내 계좌에서 돈이 옮겨졌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고,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다. AI 에이전트가 그랬다고 한다’고 항의하는 상황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도, 뱅크오브아메리카가 AI 에이전트의 계좌 접근을 제한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같은 조치는 지난 9월 메타가 개인용 AI 비서인 ‘뮤즈(Muse) AI’를 출시한 이후 확산된 우려와 맞물려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소비자를 대신해 금융 업무를 수행하는 AI 봇이 수익률을 최적화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유휴자금을 은행 예금에서 다른 금융상품으로 옮길 수 있다는 것이다.
AI 기업들은 개인의 재정을 관리하도록 돕는 새로운 도구와 챗봇을 앞다퉈 출시하고 있다. 아폴로의 수석 이코노미스트 토르스텐 슬로크가 작성한 보고서는 이러한 우려를 더욱 증폭시켰다고 FT는 강조했다. 그는 AI 비서가 가계의 현금을 자동으로 옮겨, 수익률이 낮은 계좌 대신 더 높은 금리를 지급하는 계좌에 예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한 사례에 따르면, 미국의 일반적인 당좌예금 계좌 금리는 평균 약 0.1%다. 반면, 일부 대안 계좌는 연 3.3~5%의 금리를 제공한다. AI 비서가 이 차이를 자동으로 활용한다면, 소비자는 별다른 노력 없이도 현금 보유 수익을 높일 수 있다고 FT는 설명했다.
문제는 은행 입장에서 이러한 변화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점이다. 제이피모건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웰스파고가 보유한 무이자 예금은 총 1조6000억 달러(약 2138조 2400억 원)에 이른다. 이는 세 은행 부채의 약 16%를 차지한다.
이 예금에 연 3%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면, 세 은행의 연간 추가 비용은 470억 달러(약 62조 8108억 원)에 달한다.
이는 세 은행의 연간 합산 순이익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라고 FT는 분석했다. 은행들이 고객의 예금 이탈을 막기 위해 소매예금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면 수익성은 크게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슬로크는 FT에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모든 가계가 AI 에이전트를 이용해 현금 잔액의 수익률을 최적화한다면, 은행들은 대출 재원으로 활용하는 저비용 예금의 상당 부분을 잃을 수 있다. 이는 금융 시스템 전체에 문제가 될 것이다.”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 경영진들은 소비자들이 AI 에이전트를 통해 금융거래를 수행하는 사례가 급증하는 것과 관련해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관계자들에게 우려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의 내용을 아는 한 관계자가 FT에 이같이 전했다. 연준은 논평을 거부했다고 한다.
고객 계좌에 대한 AI 에이전트의 접근을 차단하는 은행들의 조치를, 규제당국자들은 사적으로 긍정 평가했다고 FT는 밝혔다. 자율적으로 작동하는 기술에 금융거래를 수행하도록 고객이 어떻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는지, 또 문제가 발생하면 누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는 법적 정비가 필요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라는 것이다.
씨티그룹은 다만, 고객이 일부 오픈뱅킹 사업자를 통해 계좌 정보에 제한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경우 허용되는 것은 조회 전용(read-only) 접근이며, AI가 고객 계좌에서 직접 돈을 이체하거나 거래하는 것과는 구분된다.
제이미 다이먼 제이피모건체이스 CEO도, 고객 계좌에 대한 AI 에이전트의 접근을 제한하겠다고 최근 밝혔다. “통제되지 않는 에이전트가 등장할 수 있고, 그런 에이전트가 수천 개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다이먼 CEO는 3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고객을 올바른 방식으로 보호해야 한다. 이를 위해 관련 도구를 구축하고 있다. 그동안에는, 아무 외부 에이전트나 회사 내부 시스템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고객에게 너무 큰 위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컨설팅업체 사이먼쿠처의 크리스토프 슈테크마이어 선임 파트너는 은행들이 고객의 예금을 자사에 계속 유지하도록 유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출금리 혜택과 연계한 로열티 프로그램 확대 등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은행은 고객이 예금을 쉽게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도록 예금상품의 고객 유지력을 높여야 한다”고 그는 FT에 역설했다.
한편 로이터에 따르면, 일부 은행 고객들은 AI 에이전트에 자신의 로그인 ID와 비밀번호를 공유했다. 은행들은 대체로 이러한 에이전트가 수행하는 거래를 탐지하고 차단했다.
다만 고객이 자신의 로그인 정보를 직접 제공한 경우에는 해당 거래를 무조건 무단 거래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로이터는 지적했다. 고객이 에이전트에 계좌 접근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도 제3자 에이전트가 자사 플랫폼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했다. 다만 이 사안에 정통한 관계자에 따르면, 모건스탠리는 무단으로 접근하거나 통제에서 벗어난 AI 에이전트가 실제로 활동한 사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권선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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