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AI고속도로, 중동발 ‘에너지 파고’에 멈춰서나

이코노미스트, “민주화로 산업정책 조정 난항, 박정희식 정책은 힘들어”

중동발 에너지 위기가 한국 정부의 야심찬 인공지능(AI) 산업 전략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한국은 1970년대 석유파동 속에서도 산업화를 밀어붙였던 과거가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국의 공급망·재정·정치적 제약이 동시에 작용하고 있어, 산업정책의 추진력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최근 보도했다.

한국 정부는 AI 시대 대응을 위해 대규모의 반도체 중심 산업정책을 추진중이며, 주택시장 자금을 산업으로 이동시키는 금융 구조 개편을 병행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짚었다. 그러나, △중동발 에너지 충격, △원자재 공급 불안, △재정 부담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데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분산 전략 간의 정책 충돌도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코노미스트는 “그 충돌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에 따르면, 중동발 석유 충격이 세계를 뒤흔들던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오히려 결연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한국 경제라는 배가 거센 파도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 같지만, 그 거친 바다 뒤에는 훨씬 더 강한 바람이 불고 있다”고. 

이는 1974년, 1차 아랍 석유 금수 조치가 세계 시장을 강타한 지 3개월 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학공업 등 미래 성장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야심찬 계획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그는 밝혔다.

그 이후 한국은 독재를 버렸다. 한국은 그러나 산업정책과 강한 비유적 표현은 버리지 않았다고 이코노미스트는 밝혔다. 지난해 11월, 신임 이재명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깔았다면, 나는 AI 시대의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그의 계획은 주택시장에 쏠린 자본을 산업으로 돌리고, 특히 글로벌 AI 붐의 핵심인 반도체 산업에 집중투자하는 것이다. 여기에 정부 재정 지원을 더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이 계획이 1970년대와 유사한 상황 속에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강조했다. 한국은 석유의 70%, 천연가스의 20%를 중동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이 공급망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

이재명 대통령은 이 ‘AI 고속도로’를 위해 향후 20년간 반도체 산업에 5300억 달러(약 789조 70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정부 1년 예산과 맞먹는 규모. 또한, 반도체 기업 주식 등에 투자하는 500억 달러(약 74조 4700억 원)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고, 이를 통해 민간에서 추가로 500억 달러를 끌어내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1월에는 정부가 기업에 직접 자금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하는 법도 통과시켰다.

이 비전의 핵심은 서울 남쪽 약 40km에 위치한 용인시에 조성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는 2047년까지 총 7000억 달러(약 1042조 16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지난 10년간 이들의 전체 설비투자보다 30% 이상 많은 규모.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단순히 메모리 반도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보고 있다. 또한, 두 대기업 중심 구조를 벗어나 보다 폭넓은 공급망을 구축해 국내외 과점 구조 의존도를 줄이려는 의도도 있다는 것. 예를 들어 하이닉스는 중소 장비·소재 기업들이 제품을 시험할 수 있는 ‘미니 팹’을 건설 중이다. 또한,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성과를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 남부 3개 도시를 연결하는 ‘반도체 벨트’ 구축 계획도 발표했다.

두 번째 전략은 ‘생산적 금융’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설명했다. 정부는 한국 자금이 지나치게 부동산으로 쏠려 있다고 보고 있다. 한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90%로, 미국·일본(60~70%)보다 훨씬 높다. 특히 서울의 집값은 급등했다.

이 문제를 악화시키는 요소가 전세 제도라는 것. 세입자는 월세 대신 집값의 절반이 넘는 거액을 무이자로 집주인에게 맡기고, 계약 종료 시 돌려받는다. 전세 대출은 전체 가계부채의 11%를 차지한다. 집주인은 이 돈으로 추가 부동산을 매입해 가격 상승을 더욱 부추긴다.

이에 따라 정부는 주택담보대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주택담보대출 비율이 기존 50%에서 40%로 낮아졌다(다른 도시에서는 70%). 대출 총액도 제한된다. 4월 1일부터는 보험사 등 비은행권 대출에도 규제가 확대됐다.

반면, 벤처 투자 활성화를 위해 정부는 은행이 벤처캐피털 투자에 적용해야 하는 위험가중치를 낮췄다. 기업대출에도 이를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실제로 지난해 국내 4대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증가율은 절반 수준으로 둔화됐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에너지 충격과 충돌하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주장했다. 미국과 이란 간 휴전이 유지되더라도, 시장 혼란은 수개월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 한국의 천연가스 비축량은 며칠 분에 불과하다. 중동에서 액화천연가스(LNG)가 도착하기까지 수주가 걸린다.

반도체 산업은 브롬(97% 이스라엘 생산)과 헬륨(65% 카타르 생산) 등 핵심 원자재에도 의존한다. 대기업들은 몇 달치 재고로 버틸 수 있지만, 스타트업들은 그렇지 못하다.

정부는 긴급 재정지출의 부담도 떠안고 있다. 3월 말 발표된 추가경정예산에는 저소득층 지원금 등 GDP의 약 1% 규모 지출이 포함됐다. 이에 따라 재정적자는 목표치(3%)를 초과하고 있다. 이는 산업정책 추진에 부담이 될 수 있다.

또 다른 갈등은 ‘메가 클러스터’와 ‘반도체 벨트’ 간의 충돌이라고 이코노미스트는 지적했다. 한국 정부는 재생에너지가 풍부한 남부 지역으로 산업을 분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비판론자들은 반도체 생산의 80%가 이미 집중된 수도권을 떠나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한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재자였던 박정희는 이런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며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인 이재명은 다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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