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자본주의를 더욱 강하게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20세기에 실패했던 ‘계획경제’를 되살리는 기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AI가 인간의 생산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생산·투자·자원배분 등에 관한 의사결정을 맡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가 점점 자본주의의 ‘시장’보다는, 사회주의의 ‘계획’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FT)가 최근 보도했다. 특히 과거 중앙계획경제의 최대 약점으로 꼽혔던 ‘정보 부족’ 문제가, 인터넷과 AI의 등장으로 크게 완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FT에 따르면, 이 문제의 뿌리는 20세기 초 벌어진 ‘사회주의 계산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스트리아학파 경제학자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중앙정부가 경제 전체를 계획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경제에는 수많은 개인과 기업이 보유한 분산된 정보가 존재하고, 중앙정부가 이를 모두 수집해 최적의 자원배분을 계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특히 하이에크는 1945년 발표한 논문에서 ”시장가격 자체가 경제에 흩어진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특정 원자재 가격이 갑자기 오르면, 기업들은 공급 부족이나 수요 증가라는 신호를 가격을 통해 전달받는다.
중앙정부가 전국의 기업과 소비자에게 일일이 상황을 묻지 않아도, 가격 하나가 수많은 정보를 압축해 전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20세기에는 중앙계획보다 시장경제가 효율적인 자원배분 방식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하지만 AI 시대가 이 오래된 논리를 뒤흔들 수 있다. 과거 중앙정부가 경제정보를 얻으려면 조사원들이 직접 시장과 공장을 돌아다녀야 했다.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온라인 쇼핑몰에서는 가격과 판매량이 실시간으로 기록된다. 기업의 재고와 주문량도 디지털 데이터로 축적된다. 신용카드와 모바일 결제, 전자상거래, 물류 시스템, 스마트공장, 사물인터넷(IoT) 등을 통해 소비와 생산 활동의 상당 부분이 데이터로 남는다.
AI는 이처럼 방대한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다. 과거에는 데이터를 중앙에서 처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데이터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AI가 등장하면서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가’에서 ‘데이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로 문제가 바뀌고 있는 것이라고 FT는 설명했다.
특히 생성형 AI와 AI 에이전트가 발전하면서, 상황은 더욱 달라질 수 있다. AI는 소비자의 구매 패턴과 기업의 생산능력, 원자재 가격, 물류 상황, 재고량, 날씨, 에너지 수요 등을 종합해 미래의 수요와 공급을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굳이 시장가격이 변화한 뒤에 대응할 필요가 없게 된다. 시장가격보다 먼저, 경제의 변화를 예측해 자원을 배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이에크가 제기했던 ‘중앙계획자는 경제에 흩어진 정보를 확보할 수 없다’는 문제에, AI가 기술적인 해법을 제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AI가 시장의 실패까지 계산에 포함할 가능성이라고 FT는 강조했다. 시장에서는 소비자와 기업이 항상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정보 부족으로 잘못된 상품을 선택하기도 하고, 금융시장에서는 거품과 폭락이 발생한다. 환경오염과 기후변화 같은 외부효과도 가격에 충분히 반영되지 않는다. 만약 AI가 경제 전체의 데이터를 이용해 사회적 비용까지 계산한다면, 단순히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자원을 배분하는 방식’과 다른 의사결정이 가능해진다고 FT는 분석했다
예컨대,탄소 배출량과 전력 수요, 산업별 생산량을 동시에 분석한 AI는 전체의 에너지 자원 배분을 결정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시장가격만으로 움직이는 경제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AI 시대에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기존의 이분법 자체가 흔들릴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FT에 따르면, 이것이 AI가 자본주의를 폐기하고 사회주의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시장경제 내부에 AI를 이용한 ‘계획 기능’이 점점 더 많이 들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기업들은 이미 AI를 이용해 생산량과 재고, 물류, 가격, 인력 등을 최적화하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AI를 이용해 대출과 투자, 자산배분을 결정하고 있다. 정부 역시 세수와 복지, 에너지, 교통, 산업정책 등을 AI로 예측하고 최적화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경제의 겉모습은 시장경제지만 실제 의사결정 과정은 점점 ‘AI가 계산한 최적해’를 따르는 계획경제적 형태로 바뀔 수 있다. 특히 금융시장이 가장 큰 변화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고 FT는 지적했다. 자본주의에서 핵심 자원인 자본을 어디에 배분할 것인지를 AI가 결정하게 되면, AI는 단순한 투자 조언자가 아니라 사실상 경제 전체의 자본배분 엔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다만 AI가 계획경제의 정보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AI 계획경제’가 곧 성공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을 최적화할 것인가다.
△경제성장률을 최대화할 것인지, △고용을 늘릴 것인지, △소득격차를 줄일 것인지, △탄소배출을 줄일 것인지, △개인의 자유를 확대할 것인지. 이에 따라 AI가 내놓는 ‘최적의 해법’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AI가 계산 능력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사회가 어떤 가치를 선택해야 하는지까지 결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AI 시대의 진짜 논쟁은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아닐 수 있다고 FT는 보고 있다. 시장가격이 인간의 경제적 의사결정을 지배하던 시대에서, AI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자원배분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는 시대로 넘어갈 것인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될 수 있다.
100년 전 하이에크가 중앙계획의 가장 큰 약점으로 꼽았던 것은 ‘정보’였다고 FT는 밝혔다. AI가 그 정보를 사실상 실시간으로 모으고 분석할 수 있게 된다면, 시장경제의 승리를 뒷받침했던 논리의 전제 하나가 사라지는 셈이라는 것.
FT에 따르면, AI가 사회주의를 되살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지고 있다. AI가 발전할수록 자본주의와 계획경제의 경계 자체가 흐려질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권선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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