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금융의 돌파구는 스테이블코인…금지는 비현실적”

FT, “달러 페그가 99% 점유, 유로 페그 있어야 해외 플랫폼으로 안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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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이블코인에 두려움을 떨쳐내지 않으면, 유럽은 글로벌 금융의 변방으로 밀려날 것이다. 유로기반 스테이블코인이 활성화돼야, 유로화 예금이 해외 플랫폼으로 안나간다.”

블록체인 등 디지털금융 혁신에 보수적인 유럽 금융계에서, 유로 페그(Peg) 스테이블코인에 더욱 힘을 쏟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전 집행이사로 현재 프랑스 은행 소시에테 제네랄의 회장인 로렌초 비니 스마기(Lorenzo Bini Smaghi)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문을 통해 “문화적 위험회피와 은행들의 소극성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스테이블코인은 금융의 구조 자체를 바꾸는 혁신 기술”이라며 “미국은 적극적인 규제 정비와 민간 혁신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99%를 달러 기반으로 선점 중”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유럽은 장기적으로 통화주권, 결제시스템, 금융정책 효과까지 위협받게 됐다”며 ECB의 적극적인 리더십을 요구했다.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라, 은행과 정책당국의 인식 전환과 기술 투자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FT의 기고문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전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드는 새로운 혁신 세력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각국 중앙은행들도 이에 주목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 1달러 고정가치(par value)에서 벗어나는 가격 이탈이 발생할 수 있다. 이는 통화의 안정성을 위협할 수 있다고 최근 각국 중앙은행의 중앙은행 격인 국제결제은행(BIS)이 경고했다. 발행자는 특히 준비금 가치가 하락하거나 유동성이 부족할 경우, 상환 요청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근거로 스테이블코인을 금지하자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비현실적이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FT 기고문은 주장했다. 오히려 스테이블코인은 금융 시스템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기술적 돌파구로 인식돼야 한다는 것. 

FT에 따르면, 스테이블코인은 탈중앙화된 인프라 위에서 작동한다. 국경을 넘는 개인 간 거래는 거의 즉시, 저비용으로 수행할 수 있다. 국채를 담보로 하기 때문에 대규모로 활용될 경우, 공공 부채 조달에도 활용될 수 있다. 더 넓게 보면, 스테이블코인의 기반 기술인 ‘토큰화’는 자본시장을 현대화하고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다.

이 점을 미국은 간파하고 있다고 FT의 기고문은 지적했다. 미국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규제하기 위한 ‘지니어스 법률(Genius Act)’ 같은 법적 장치를 마련하며 민간 부문의 혁신을 촉진하고 있다. 주요 은행과 금융기관들이 빠르게 이 흐름에 합류 중이다.

유럽 역시, 일정 부분 규제 기반을 갖췄다. 유럽연합(EU)의 ‘가상자산시장(MiCA·Markets in Crypto-Assets)’ 법은 세계에서 가장 포괄적인 규제 체계 중 하나로, 중앙은행의 일부 우려를 해소했다. 이 규정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자가 고유동성, 고품질 자산(30%는 현금, 나머지는 높은 등급의 국채)을 보유하도록 해, 유동성 리스크를 관리하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분산원장기술(DLT·Distributed Ledger Technology)을 위한 EU의 실험(Pilot) 제도도 강력한 시장 인프라 구축의 기초를 마련했다.

그럼에도 유럽은 여전히 뒤처져 있다고 FT기고문은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의 99%는 미국에서 발행되며, 모두 달러 기반. 유로화는 이 새로운 디지털 금융 생태계에서 존재감조차 없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은, 규제 자체보다는 문화에 있다고 FT의 기고문은 지적했다. 유럽은 뿌리 깊은 ‘위험회피’와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혁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 많은 유럽 은행은 스테이블코인을, 자신들의 수익성 높은 결제·송금 사업을 위협하는 존재로 본다. 기술과 인력 투자가 막대하기 때문에, 먼저 나서려는 은행이 거의 없다.

이는 전형적인 ‘조정 실패’ 사례다. 방치된다면 유럽은 점점 더 뒤처질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공공 부문, 특히 금융당국의 리더십이 절실하다. 그러나 유럽의 통화당국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의 근본적인 오해 때문이다.

첫째, 토큰화가 유럽 자본시장 통합과 안전한 유로화 자산 개발에 주는 전략적 이점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소매용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가 전통 인프라에서 작동한다고 해도, 스테이블코인과 경쟁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라는 것.

둘째, 유럽이 글로벌 스테이블코인 사용으로부터 고립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금융 시스템은 상호 연결되어 있어, 이는 현실적이지 않다.

셋째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스테이블코인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 결국 유럽의 통화주권이 위협받게 된다는 점. 유럽 내에서 유로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고 널리 사용되지 않는다면, 유로화 예금은 해외 플랫폼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는 유럽의 결제시스템을 우회(disintermediate)하게 만들며, 통화와 금융 흐름에 대한 통제력을 약화시킨다. 장기적으로는 금융안정성과 정책 효과에도 악영향을 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은 미국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 미국은 연준을 스테이블코인 규제 논의에서 배제한 반면, 유럽중앙은행은 아직 제도적으로 중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발행 규제뿐만 아니라, 시스템 리스크를 줄이고 혁신을 조율하는 데도 유리하다.

유럽은 지나친 규제와 기술 둔화로 비판받아 왔다. 지금이야말로 다른 길을 갈 기회다. 필요한 도구는 갖춰져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리더십이다. 이를 놓친다면, 유럽은 미래 글로벌 금융에서 단순한 후발주자가 아닌, 아예 변방으로 밀려나게 될 것이라고 FT는 주장했다.

권세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