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매매(HFT)업계의 일부 경쟁사들이 ‘부정한 투기적 트리거링(CST·Corrupted Speculative Triggering)’이라는 불공정한 기법을 사용해 매년 수천억원의 부당수익을 올리고 있다”. 한 고속매매 회사가 이렇게 주장해 글로벌 금융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독일 선물거래소인 유렉스(Eurex)에서 거래할 때, 이 기법은 3.2나노(32억분의 1)초의 속도 우위를 제공하기 때문.
금융기술의 발달에 따라, 시장의 경쟁 단위가 ‘나노 초 단위의 물리적 한계’로 이동하고 있다. 나노초는 빛이 30cm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초고속 트레이더들은 이 미세한 시간 차이를 이용해 연관 자산 간 가격 왜곡을 선점하고, 이를 반복해 연간 수천억원을 벌어들이고 있다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한때는 1밀리초(1000분의 1초)만 빨라도, 세계 최고 속도의 트레이더들 사이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의미했다. 그러나 세계 최대 선물거래소 중 하나에서 벌어진 막대한 수익을 둘러싼 분쟁은, 이제 이들이 그보다 백만 배나 더 빠른 단위로 사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WSJ에 따르면, 논란의 핵심은 일반인에게는 생소한 기술적 기법이다. 이 기법은 고속매매 업체들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본사를 둔 유렉스 거래소에 무의미한 데이터를 대량으로 쏟아붓는 것. 목적은 고속매매 업체들이 거래소와의 연결 상태를 ‘예열(warm)상태’로 유지해, 시장에 영향을 미칠 정보가 들어오는 순간 아주 조금이라도 더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서다.
초고속·비밀주의적 트레이딩 회사들은 수십년간 속도경쟁을 벌여왔다. 이번 분쟁은 이 최신 장면에 해당한다. 이들 트레이딩 회사는 미세한 속도 우위를 얻기 위해 집요한 경쟁을 벌여왔다고 WSJ는 밝혔다.
프랑스 업체인 모자이크 파이낸스는, 일부 고빈도 트레이딩 업체들이 CST 기법을 악용해 수억 달러(수 천억원)의 수익을 거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유렉스와 유럽 규제 당국에 문제를 제기했다. 모자이크의 설립자인 위그 모랭은 “군비 경쟁 자체는 괜찮다. 하지만 합법적인 무기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유렉스는 모자이크의 주장이 근거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최근, 이 기법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는 시스템 업그레이드를 발표했다.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이 기법이 규제의 회색지대에 해당한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모랭에 따르면, 모자이크는 2022년까지 유렉스에서 성공적인 고속매매 사업을 운영해왔다. 그러나 그해를 기점으로 수익이 갑자기 90%나 급감했다. 파리 본사의 모자이크는 초기에는 그 원인을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몇 차례 테스트 끝에 결론에 이르렀다. 경쟁사들이 ‘잘못된 데이터’를 유렉스에 대량 전송해 지속적인 미세 속도 우위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
12월 초 제출된 민원에서 모자이크는, 유렉스가 이러한 “불공정한” 관행을 묵인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소수의 과점적 고빈도 트레이딩 업체들이 거래를 지배하도록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조사를 요청했다. 이 문건은 WSJ가 입수해 검토했다.
지난 3년간 이 기법을 통해 트레이딩 업체들이 최대 6억 유로(약 1조 487억 1600만 원)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고 모자이크는 주장했다. 유렉스에 대해서도, 고속 데이터 연결 비용을 부과해 매출을 늘렸다고 했다.
독일 거래소 그룹 도이체 뵈르제 산하의 유렉스는, “규정을 엄격히 집행하고 있으며 비정상적이거나 잘못된 데이터 전송을 감지할 수 있는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렉스 대변인은 “이 개별 거래 참가자의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제기된 핵심 사안들은 이미 반복적으로 검토됐다. 그 어떤 문제도 타당성이 입증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논평을 거부했다.
2000년대 초, 트레이딩 회사들은 미국 시카고와 뉴욕 같은 금융허브를 잇는 노선을 따라 마이크로파 안테나 네트워크에 투자해, 거래소 간 데이터 전송 속도를 높였다. 당시 속도 개선은 밀리초 단위로 측정됐다.
그러나 지금의 전장은 나노초 단위라고 WSJ는 말했다. 나노초는 빛이 약 30cm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 이러한 우위를 확보하려면 자동화 거래 시스템을 극단적으로 미세하게 최적화해야 한다.
고속매매 업체들은 연관 자산 간에 잠깐 나타나는 가격 차이를 포착해 수익을 내기 때문에, 반응 속도는 결정적이다. 예를 들어, 유로존 대표 지수인 유로스톡스50 선물 가격이 오르면, 독일 주가지수인 닥스(DAX·Deutscher Aktien IndeX) 선물도 뒤따라 오르는 경우가 많다. 먼저 움직인 트레이더는 DAX 선물을 가격 상승 전에 매수했다가, 가격이 오른 뒤 매도해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이런 거래가 반복되면 막대한 이익으로 이어진다.
모자이크가 문제 삼은 기법은, 반응 속도를 약 3.2나노초 개선할 수 있다. 이를 CST라고 부른다. 이 기법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유렉스의 주문은 ‘패킷’이라 불리는 1과 0의 작은 데이터 묶음으로 인코딩된다. 이더넷 프로토콜 규칙에 따라, 각 패킷은 먼저 ‘프리앰블(preamble)’이라는 신호를 보내 데이터 전송이 시작됨을 알린다. 실제 매수·매도 명령은 그 뒤에 이어진다.
트레이딩 회사는 거래 여부를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프리앰블을 전송함으로써, 몇 나노초를 절약할 수 있다. 이후 매수·매도 결정을 내리면, 나머지 패킷에 명령을 즉시 삽입한다. 거래하지 않기로 하면, 비어 있거나 의도적으로 깨진 패킷을 유렉스로 전송한다.
네덜란드 기반의 글로벌 트레이딩 회사인 옵티버 역시 모자이크가 설명한 것과 유사한 전략을 사용해 왔다고 사정에 밝은 인사들은 전했다. 옵티버 측은 논평을 거부했다.
미국 시카고의 소형 업체인 이머전트 트레이딩도 유렉스에서 몇 나노초의 속도 우위를 얻기 위해 유사한 기법을 사용한다고, 창립자인 브랜든 리처드슨이 밝혔다. 그는 이 기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며, 고속매매 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고, 다른 회사들도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는, 유렉스와의 ‘고양이와 쥐’ 게임을 언급했다. 한 차례는 유렉스가 감시 시스템을 업그레이드한 뒤 이머전트의 기법을 적발하고 중단을 요구했다. 하지만, 다른 업체들이 사용하는 변형된 기법은 여전히 작동했다는 것이다. 리처드슨은 “그들은 내 트릭은 잡아냈지만, 다른 사람들의 트릭은 잡아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WSJ에 따르면, 전장은 다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유렉스는 지난 12월 8일, 내년 4월부터 적용될 감시 시스템 전면 개편과 기술적 변경을 발표했다. 일부 트레이더들은 이 조치가 CST를 사실상 종식시킬 것이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속매매 업체들이 더 빠른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 나설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WSJ는 강조했다.
권세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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