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권시장이 블록체인 기반의 ‘토큰화 주식’ 시대를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상장주식의 온체인 거래를 촉진하기 위한 조치를 내놓으면서 전통 금융회사와 가상자산 기업들의 시장 선점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주식 거래가 24시간으로 확대되고 결제 시간이 단축되는 새로운 금융 인프라가 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SEC는 지난달 17일 특정 토큰증권 거래 플랫폼과 유동성 공급자에게 5년 조건부로 규제 예외를 부여한데 이어, 지난 20일 관련 실무 지침도 공개했다. 기존 증권거래소와 딜러에 적용되는 일부 규정의 적용을 제한적으로 면제해 블록체인 기반 주식 거래를 허용하는 내용이다.
다만, 미국은 △주가를 따라 움직이는 가상자산과 △실제 주식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토큰을 구분하고 있다. 투자자에게 기존 주주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하고 시장 감시 체계를 갖추는 것이 제도권 진입의 핵심 조건이라고 미국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SEC의 새로운 규제 조치로 관련 기업들은 토큰화 주식 거래 플랫폼 출시 계획을 앞당기고 있다. 그러나, 회의론자들은 토큰화 주식이 가격 조작, 과도한 변동성, 사이버 보안 위험에 취약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토큰화 주식 보유해도, 주주가 아닐 수 있어”
WSJ에 따르면, 미국인 마틴 쿠프먼과 이스마엘 아사드는 모두 토큰화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주주는 쿠프먼뿐이라며 그 이유를 다음처럼 기술했다.
금융기술 기업 헤이즐 트리의 최고제품책임자(CPO)인 쿠프먼은 나스닥에 상장된 피규어 테크놀로지 솔루션스의 주식 토큰을 보유하고 있다. 이 토큰은 해당 기업의 일반 상장주식과 동일한 배당권과 의결권을 제공한다. 반면, 가상자산 투자회사인 비트와이즈 자산운용의 리서치 애널리스트인 아사드는 게임스톱 주가를 추종하는 토큰을 보유하고 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이제, 적어도 미국에서는 규제를 구분하는 기준이 됐다고 WSJ는 강조했다. SEC의 새로운 규제 체계에 따라 거래하려면 토큰 보유자에게 일반 주식 보유자와 동일한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토큰화 주식은 가상자산의 기반이 되는 장부 시스템인 블록체인에서 거래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토큰화 주식은 주로 해외 투자자들이 이용하는 틈새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전통 금융회사와 신생 가상자산 기업은 물론, 규제 당국까지 토큰화를 미국 시장에 도입하려 하고 있다. 앞으로의 구체적인 경로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토큰화 주식이 가진 잠재력은 분명하다. 주식시장의 구조 자체를 바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난달 SEC는 두 가지 ‘혁신 예외(innovation exemptions)’ 조치를 통해, 미국 내 거래 플랫폼이 토큰화 주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토큰화 주식 거래 플랫폼 출시 계획을 서두르고 있다.
이러한 예외 조치는 그동안의 일부 규제를 한시적으로 면제한다. 인가된 거래 플랫폼과 시장조성자가, 상장기업의 주식을 나타내는 디지털 토큰을 거래할 때 적용되던 규제다. 이전에는 이러한 규제가 주식 토큰 거래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WSJ은 설명했다.
월스트리트의 주요 금융회사들은 미국 국채와 머니마켓펀드(MMF)를 거래 가능한 토큰으로 전환하는 데 이미 속도를 내고 있다. 증권사와 가상자산 거래소들도,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 어려운 해외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미국 주식을 토큰 형태로 제공해 왔다.
WSJ에 따르면, 가상자산 업계 지지자들은 토큰화 주식이 금융시장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24시간 거래를 할 수 있고 △거래 비용을 낮추며 △결제를 즉시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회의론자들은 거래량이 적은 시간대나 정규시장 종료 후에도 주식을 거래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거래가 뜸한 시간대에는 △가격 조작 △과도한 변동성 △사이버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블록체인에서 주식을 거래하는 미래가 투자자들에게 머지않아 현실이 될 수 있다. 나스닥과 뉴욕증권거래소(NYSE) 같은 대형 거래소가 토큰화 주식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들도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이제 토큰화 주식과 관련해 알아야 할 다섯 가지를 살펴보자.
“토큰화 주식이란 무엇인가?”
토큰화 주식은 상장기업의 주식을 나타내는 디지털 토큰이다. 현재 거래되는 토큰화 주식의 상당수는 기술적으로, 주가를 추종하는 파생상품에 가깝다. 실제 주식 소유에 수반되는 모든 권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는 △배당금 수령권, △주주총회 안건에 대한 의결권을 포함해 실제 주식 소유권에 해당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토큰이 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사드는 보유한 게임스톱 토큰을, 사용자가 지도에서 토큰화 주식을 찾아다니도록 유도하는 앱에서 무료로 받았다. 이 토큰은 별도의 기업이 발행했다. 이 기업은 보관기관에 맡겨진 게임스톱 주식을 담보로 토큰을 발행했다. 토큰 가격은 게임스톱 주가를 추종한다. 하지만, 토큰 보유자인 아사드가 게임스톱의 주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사드는 토큰을 거래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를 게임스톱의 실제 주식으로 교환할 수는 없다. 비트와이즈 자산운용의 리서치 애널리스트인 아사드는 “앱은 그런 사실을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례는 투자자가 반드시 구분해야 할 점을 보여준다고 WSJ는 역설했다. △주가를 따라 움직이는 디지털 자산을 보유하는 것과 △법적으로 주식을 소유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투자자들은 왜 토큰화 주식을 원하는가?”
토큰화 주식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하면 주식을 24시간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가상자산 투자자들에게는 익숙한 기능이다. 하지만, 기존 전통 금융시장에서는 대부분 활용되지 못했다.
토큰화는 해외 투자자들의 미국 주식시장 접근성도 확대한다. 세계 어디에 있든 투자자는 미국 대표 우량기업의 주식을 온주 또는 소수점 단위로 보유하고, 이를 가상자산과 같은 디지털 지갑에 담을 수 있다. 지지자들은 이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깊고 유동성이 풍부한 자본시장인 미국 주식시장에 전 세계 투자자들이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블록체인은 중개기관을 줄여, 주식 거래 절차를 단축할 수 있다. 그 결과 거래 비용이 낮아지고, 투자자의 수익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토큰화 자산은 시장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금융시장이 원활하게 작동하도록 돕는 역할도 할 수 있다. 일부 은행 경영진은 토큰화된 MMF를, 매우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담보 자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시장이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도 거래를 뒷받침하기 위한 담보를 즉시 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거래 비용이 줄어든다고 해서 투자 수익률이 반드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실제 효과는 유동성, 거래 수수료, 보관 비용, 가격 차이, 세금 및 관련 위험에 따라 달라진다.
“현재 어디에서 토큰화 주식을 거래할 수 있나?”
로빈후드, 코인베이스, 크라켄, 제미니 등 여러 기업은 미국 이외의 고객을 대상으로 미국 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를 기반으로 한 블록체인 상품을 제공하고 있다. 블랙록과 제이피모건체이스의 자산운용 부문 등 자산운용사들도 토큰화 MMF를 출시했다. 다만, 이들 상품 가운데 상당수는 기관투자자나 고액자산가를 주요 대상으로 한다.
쿠프먼은 10월 파이그의 앱을 통해 자사 블록체인 주식 10달러어치를 매입했다. 이는 주식의 약 1/3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파이그가 토큰을 직접 발행했기 때문에, 이 토큰은 실제 주식이다. 일반 주식과 동일한 배당권이 있고, 주식 1주당 1개의 의결권도 제공한다. 쿠프먼은 앱이 작동을 멈추더라도 주식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며, “그래도 당신은 그 주식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례는 토큰화 주식의 설계 방식이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발행 구조가 적절하다면, 주식 소유권을 블록체인상에서 표시하고 이전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WSJ는 밝혔다. 반대로, 토큰 발행자가 주가만 추종하도록 설계했다면 투자자는 주주 권리를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토큰화 주식의 위험은 무엇인가?”
토큰화 주식은 정규시장 운영시간 외에는 거래량이 적은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보다 많은 매수·매도 주문이 들어오면, 가격이 급격하게 움직일 수 있다.
규제 당국은 토큰화 자산이 △내부자 거래, 그리고 △시장 조작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도 경고해 왔다. 거래가 기존 감독 체계의 사각지대에서 이뤄질 경우, 불법 행위를 적발하고 통제하기 어려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주식시장에서는 거래소가 시장 감시 시스템을 통해 의심스러운 거래와 그 배후에 있는 사람들을 식별한다. 증권사 역시 고객의 신원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나 토큰화 주식 시장에는 이러한 통제 장치가 아직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
합성형 주식 토큰의 확산에 대해서는 기업 경영진의 반발도 나오고 있다고 WSJ는 소개했다. 에이엠씨 엔터테인먼트의 애덤 애런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소셜미디어 엑스(X)에서 로빈후드의 블라드 테네프 CEO와 충돌했다. 애런 CEO는 로빈후드가 미국 규제를 우회하고, 기업의 자본 조달 능력을 침해하며, 투자자에게 동일한 주주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테네프 CEO는 토큰화 주식 사업 확대를 옹호했다. 상장기업은 일단 주식을 공개시장에 내놓은 뒤에는, 그 주식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금융상품을 통제할 수 없다는 취지다.
시타델 시큐리티스를 포함한 일부 월스트리트 금융회사도, SEC가 혁신 예외 조치를 통해 토큰화 주식 거래를 허용하는 데 반대했다. 시타델은 SEC에 보낸 서한에서, △투자자 보호 △공정한 시장 접근 △토큰화 주식에 전통 증권과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문제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규제 당국이 제안 내용을 공개하고,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앞으로 무엇이 달라지나?”
SEC의 명령은 두 가지 5년짜리 혁신 예외 조치를 통해 미국 내 거래 플랫폼이 토큰화 주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다만 기업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엄격한 안전장치도 포함돼 있다.
제3자가 토큰화한 주식을 거래 플랫폼이 취급하려면, 해당 주식을 발행한 기업에 최소 30일 전에 통지해야 한다. 해당 기업이 이의를 제기하면, 거래 플랫폼은 그 토큰을 거래 상품으로 제공할 수 없다.
무엇보다, SEC의 예외 조치에 따라 허용되는 토큰은 전통적인 주식 투자자와 동일한 주주 권리를 제공해야 한다. 여기에는 배당금 수령권과 주주총회 의결권이 포함된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해외 증권사와 △가상자산 거래소의 합성형 주식 토큰은 현재로서는 이 미국 규제 체계의 허용 대상에서 제외된다. 이 제도는 토큰화 주식의 미국 내 도입을 추진하면서도, 기존 주식과 동등한 투자자 권리 및 시장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라고 WSJ은 보고 있다.
권선무 기자